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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an 12. 2023

나의 귀염둥이

 이불속에서 뒤척이는 아이의 얼굴에 손이 문득 닿았다. 평소보다 따뜻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 열을 재니 38도. 해열제를 먹여 재우고 아침이 되자마자 소아과를 찾았다. 지난밤 열나던 아이는 어디 갔나 싶게 밝게 웃으며 종알거리는 아이를 보며 의사가 말했다. 목이 많이 부었다고. 많이 아팠을 텐데도 내색을 안 하는 이런 아이들은 늘 상태가 좋아 보이니 더 잘 살펴야 한다고. 우리 집의 귀염둥이, 세온이를 병원에 데려가면 자주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5년 전 봄, 우리 곁에 왔다. 당시 먼저 태어나 우리 집에서 살고 있었던 그녀의 언니는 엄마의 뱃속에 동생이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귀염둥이 시어! 귀염둥이 빠빠이!”를 줄기차게 외치며 그녀를 뜨겁게 거부했다.

언니의 식사 준비와 투정으로 바쁜 엄마는 귀염둥이의 존재감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고, 그럼에도 그녀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날 진통이 와서 인파를 뚫고 산부인과에 가야 할까 봐 근심하는 엄마의 맘을 아는 듯, 휴일이 다 지나고 여유로운 밤시간 세상에 나왔다. 귀염둥이는 조리원 생활을 이미 겪어본 내향형 엄마의 선택에 의해 3일 후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서 신생아 육아를 하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부모의 맘을 달래 듯 그녀는 거의 울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작은 눈을 꿈뻑이며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엄마는 맘 편히 낮잠을 자고 아빠는 언젠가로 미뤄 두었던 일렉 콘트라베이스를 주문해 초보를 위한 교재 한 권을 떼었다.

 한 달 후, 외할머니댁에 가있던 그녀의 언니가 집에 돌아왔다. 동생을 잘 돌보고 엄마를 쉬게 해 주겠다고 다짐을 받고 왔다 했지만 언니의 맘은 질투와 승부욕으로 가득했다. 엄마가 수유를 할 때에 귀염둥이를 내려놓으라고 마구 소리를 질렀고 귀염둥이를 재우러 들어가면 따라 들어와 동생을 두고 나가자고 떼를 썼다. 귀염둥이는 먹거나 자다가 방해를 받을 때에도 자신의 존재와 자리를 확신하는 듯 평온했다. 안달복달 불안해하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네가 그래봤자 난 이미 네 동생이다 인마.”

다섯 살이 다 되어 처음 엄마와 떨어진 언니와 달리 귀염둥이는 돌이 조금 지나 어린이집에 갔고, 한참 생일이 빠른 또래들 사이에서 홀로 기저귀를 떼고 제일 먼저 팬티를 입었다. 어린이집 산책 시간에 마을 견학의 일환으로 마트에 가면 꼭 서너 봉지가 하나로 묶인 과자 세트를 골랐고 뚜껑이 덮인 대왕 미끄럼틀에 제일 먼저 올라가 겁 없이 내려오는 아이였다.


 언젠가 귀하고 기특한 아들이 어른이 막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의 경험을 써 내려간 박완서 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신께 “차라리 다른 자식(딸)을 데려가시지”라고 죄스러운 원망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당시 나는 두 딸에게 부모의 연락처가 적힌 팔찌를 꿰어주며, 내 아이가 실종이 되면 어쩌나, 아이와 애착을 형성하는 시기에 할 법한 불안이 있었다. 그리고 박완서 님처럼 절박한 상황에 이르러할 만한 상상을 해버리곤 했다. 만약 내가 둘 중 하나를 다른 사람이 키우도록 허락해야 한다면?‘ 악취미에 가까운 가정에서 내 맘은 너무나 쉽게 귀염둥이를 보내기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녀는 어디에서든 잘 지내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키워 낼 시간과 에너지가 많지 않아, 선택의 여지없이 어린 그녀가 타고난 힘을 믿으며 키워온 엄마에게 그녀는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여섯 살, 못하는 말이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개구쟁이이다. 또래에 비해 영특할 것이라는 내 믿음과 달리, 제 이름이나 겨우 읽고 쓰는 까막눈이며 놀랍게도 아직 밤 기저귀 없이는 잠도 못 잔다. 최근에는 유치원에서 친구의 장난감을 몰래 들고 와 호되게 혼이 나고 친구들 앞에서 망신도 당했다. 그러나 저러나 그녀는 내가 뽀뽀할 때 아직 통통한 볼살을 내어주고 나만 보면 세게 달려와 반갑게 안긴다. 무심코 저지른 실수 뒤엔 ‘잘못해서 창피해요’라고 말할 줄 아는 솔직한 귀염둥이이다.


 그녀가 그저 사랑스러운 아기였던 시절, 가족끼리 오붓한 휴일을 보낸 날 밤 문득 남편이 말했다.

“세온이는 우리 집에 찾아온 선물이야. “

엄마의 잔소리에 짓궂은 표정을 짓고 언니에게 화가 나 소리 지르다 피곤해 잠든 아이를 바라본다. 아직 열이 있어 따뜻한 그녀의 목덜미에 팔베개를 내어주고 침 냄새가 나는 그녀의 볼을 어루만진다.

그녀는 고맙게도 내게 찾아온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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