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차 Jan 16. 2023

필요없는 사람

‘인생의 역사’속 브레히트의 시를 읽고

신형철님의 신간,  ‘인생의 역사’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는 작가의 믿음 아래 선택 받은 서른 한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필요와 사랑에 관한 브레히트의 시와, 시에 대한 소개를 읽고 나의 이야기를 펼쳐 놓아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남편을 만나기 전에 연애했던 남자가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자의식과 빛나는 젊음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의 맘에 귀기울이고 내 시간을 나누며 더불어 어울리는 것에 서툴렀던 나. 사회에 나오면 내(가 바라는) 수준에 맞는 대화를 나누며 내게 영감을 주는 만남이 가능할 줄 알았건만, 나를 성장시키며 동시에 나의 무지와 오만함을 견뎌줄 인연은 드물었고 끝을 모르는 목마름에 나는 예민하고 초조해졌다.

 우연히 직장에서 알게 된 그는 부지런하고 다정했으나 또한 우매했다. 내가 말하는 작가들, 감독들, 예술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을 하나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저 들어 주었다. 내가 명확히 알지 못하는 말을 되는 대로 내뱉을 때조차 그는 나의 목소리, 말투, 지식과 취향 생활 방식 모든 것에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당시 낮은 자존감과 높은 이상을 한 몸뚱이 속에 욱여 넣어야 했던 나에게는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했다. 치우친 권력 속에 관계가 부서져 갈 무렵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중학교 때 부적절한 이성교제로 잃어버린 엄마의 신뢰와 애착을 대신할 존재가 내겐 절실 했음을. 나는 필요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였던 나를 숭배하고 돌보는 눈 먼 사랑이. 충분한 배신과 반복된 용인으로 나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내 존재 가치가 확인되었을 때 나는 그를 떠났고 그는 슬프게 그러나 예정대로, 당도한 이별을 담담히 맞으며 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나는 다른 사람과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브레히트의 시를 읽는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엄마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어버이날 인사 뒤에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절실한 필요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불안이 있음을 안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만큼 오래 살아야 할 나. 그러나 내 생명줄은 내 손 밖에 있기에, 내가 없이도 잘 지낼 너희를 소망하며 오늘도 아이들을 조금씩 독립시켜갈 나. 슬프게, 그러나 예정대로 너희와의 이별을 맞이하며 자유로운 너희의 뒷모습을 바라 볼 나.

 마침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없이, 그래서 살해 당할 두려움 없이. 온몸 가득 빗방울을 맞아낼 그 날을 비밀스레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귀염둥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