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기억하라
매년 여름, 파리에 갔다. 죽음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삶을 누리기 위하여.
미래의 무게를 모르던 시절부터 육아를 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 아파트 복도에서 뛰어놀다 같은 층에 살던 동생들이 모여들면, 엘리베이터 앞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동생들을 앉히고 학교에서 받은 읽기 교과서를 가져와 그들의 손등에 스티커를 붙이며 한글을 가르칠 때, 교육은 다만 권력이자 흐뭇한 놀이었다.
어른이 되어 교실에서 어린이를 가르치게 되자 내 등에는 그들의 사회화라는 임무가 지워졌다. 스스로 부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막중함에 눌렸다. 그들 앞에 펼쳐진 망망한 미래, 근시안으로 그것을 함께 지켜보는 일, 궁둥이를 두드려 나아가게 하는 일마다 자신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나에게는 필요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가져갈 죽음이, 소멸이. 내 삶은 유한하며 순간만이 실재라는 감각적 체험이.
그래서 파리로 떠났다. 우아하게 늙어버린 도시. 찬란한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도시. 여행자로서 그곳에서의 종말은 예견되어 있었고 그렇게 건강한 몸뚱아리로 시한부의 특권을 누렸다.
여행은 밀려오는 권태를 막는 둑이다. 그 둑을 눈앞에 두면 뜨겁게 행복하고, 치열하게 외로울 수 있다. 모든 것을 태우는 죽음의 화로 위에서 델듯한 두려움은 모든 순간을 축복이게 한다.
환생하지 않을, 다만 늙어가는 그 오래된 도시에서 시간은 충분히 빛났고, 나는 마침내, 그곳의 나를 죽이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종말을 잊은 채 되풀이되는 생활,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서른 명의 미래가 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내년 여름을 위해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권태조차도 시한부가 되면, 그제야 지금의 꽃같은 기쁨과 구슬 같은 슬픔을 아끼며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죽음의 무대 위에서 삶의 배경을 바꾸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웃고 운다.
사라짐을 앞두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삶의 찬란함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떠난다. 권태와 숨바꼭질하며 죽음과 함께 죽음을 향해 간다.
이야기를 계속 해내기 위해 이 이야기가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한다. 시간과 공간의 소멸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