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우리 가족은 내년 여름, 일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지구 어디든, 남편이 공부하며 근무할 병원 한 곳을 정해 근처로 이사를 하면 된다.
넓은 세상을 만날 만큼 컸으면서 아직은 학업 부담이 적은 초등학생 두 딸, 올해 개원한 센터의 장으로서 한 해 뜨겁게 일한 후 휴식이 필요한 남편, 짧은 생 속에서 미처 가보지 못할 장소와 해보지 못할 경험들에 목말라 있는 나의 삼박자로 우리는 선뜻 떠나기로 했다. 나도, 그도 무급 휴직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이주와 거주에 따른 비용부담이 크다는 점을 제외하면 환영할만한 기회였다. 이미 붕 떠 버린 마음을 달래기는 불가능할 듯하여,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다녀와서 갚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가족의 외국어 능력을 고려해 영어권으로 선택지를 좁히고, 제주에서도 가까운 아시아권 나라를 제외하니, 영국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정도가 손에 꼽혔다.
아, 영국!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사와 문화유산, 단정하게 교육받은 시민들의 나라. 무엇보다 나의 사랑 빠히가 가까이 있는 곳. 설렘으로 궁둥이가 들썩거리나 런던의 높은 집세를 상기하며 진정한다. 피차 유럽은 내 평생의 휴가지가 될 것이니 딱 기다리라고 읖조리며, 눈길을 돌렸다.
아늑한 제주에 안겨 살다, 버려둔 땅도 허벌나게 많다는 대륙의 어드메에 네 식구 살 곳을 정하려니 너무나 막막하다. 견문은 좁은 데 선택지만 많아, 온갖 정보들을 검색하다 지쳐버린 우리는 그냥, 남들처럼 미국에 가기로 한다. 지구촌을 주름잡는 부와 권력의 중심지, 주말이나 아이들 방학마다 여행 다닐 곳이 충분하고, 우리의 외국어 실력을 (쉽지 않게) 향상 시킬 나라. 무엇보다 내 가까운 대학 친구가 살고, 남편의 선배가 연수로 다녀온 나라.
대학 친구에게 뉴저지를, 남편의 선배에게 NC(노스캐롤라이나)를 추천받았는데 주 하나는 또 왜 이리 넓은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눈 빠지게 지역을 검색한다. 편의시설이 가까우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좋고 안전한 곳. 뉴저지의 포트리 또는 NC의 채플힐로 최종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의 삶을 상상해본다.
맨하탄 인근의 뉴저지, 이 곳은 집세가 비싸다. 우리 가족은 다가구 건물의 2층에 산다. 방은 두 개, 거실도 좁아, 제주 집에서의 공간과 풍경이 그립다. 세인이는 자기 방을 잃은 대신 꿈꾸던 이층침대를 얻었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은 차를 타고 30분 거리의 병원으로 출근한다. 영어 발음이 어눌한 그는 오늘도 교포인 의사 외 다른 사람 과의 만남이 부담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조금 더 하고 올 걸,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늘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떠날 때쯤에 우리 모두 더 자라 있을 거야, 서로 위로한다. 이곳에서 서로를 챙겨 줄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다.
남편을 보내고 나와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간다. 빠듯한 한달 예산 문제로 차가 한 대뿐이라, 집이 학교에서 가까운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이들 학급에는 한국 친구들이 몇 명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낯설어하지 않게 조금씩 챙겨주는 모양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재빨리 집안을 정리한 후 맨하탄 행 버스를 타러 간다. 오늘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갈 예정이다. 광활한 그곳은 매일 가도 전에 놓쳤던 그림을 마주한다. 아이들 하교까지 6시간, 나는 홀로 뉴욕을 여행할 수 있다.
NC주 채플힐에서의 아침은 어떨까. 우리 가족은 조용한 마을 속 타운 하우스에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신발. 차를 타지 않고는 통학도, 식료품 쇼핑도 불가능하다. 아이들 도시락으로 햄 주먹밥을 싸서 책가방에 넣어주고 여분의 주먹밥은 아침 식사로 접시에 올린다. 남편이 출근한 후,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준다. 집 근처는 녹음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다. 겨울에도 많이 춥지 않으니, 사계절 푸른 하늘을 보며 산책 할 수 있겠다. 안전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내일부터는 한시간 가량 조깅을 해볼까 생각한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해 먹을 저녁 식사 메뉴를 떠올려보고는 30분 거리에 있는 한인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가는 길에 로드킬 주의 표지판을 마주치고, 나는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으며 숲과 목초지 사이를 한가롭게 운전한다.
서울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사랑하면서도 긴장과 복잡함에 움츠러 들던 나는, 단조롭지만 아름다운 제주에 왔다. 이곳은 성취할 것이 적은 동시에 뭔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 나는 이곳에서 자연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나 또한 이곳을 사랑했다.
다양하고 즐거운, 심심할 일이 없지만 동시에 나를 빠듯하게 할 대도시 옆 뉴저지와, 한가롭고 아름답지만 나를 지루하고 허무하게 할지 모를 NC 중 나는 어떤 곳으로 가게 될까?
목적지를 정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선뜻 답을 내지 못하는 나,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다.
긴 고민 끝에 선택한 곳에서 나는 치열하게 즐기고, 또한 애쓰는 내모습을 꼭 안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