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성벽
스무 살, 수능 성적에 맞춰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놀기도 잘하는 선배, 동기들과 여행을 다니고 기타를 배워 공연도 했다.
그러나 강의실에 들어갈 때만은 주눅이 들었다. 학과 공부는 내 관심과 적성을 모두 벗어난 것이었다. 학업에는 뜻을 잃은 채, 선배들의 실없는 농담에 웃고, 동기들 앞에서 돋보이고 싶은 욕심에 허튼 소리를 하며, 친구들의 미숙한 연애설에 기웃댔다. 그리고 가을이 올 때쯤엔 학교의 모든 것이 지겨워져 있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은 좋은 글을 읽고 내 생각을 써보는 것,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는 스물한 살에 비로소 어른이 된 마음으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 하루를 정성껏 채워 나갔다.
하고 싶어 시작한 공부는 즐거웠다. 고등학교 때 마지못해 들여다보던 수학이나 역사 교과서, 지난한 문제풀이의 과정 안에 지적 유희와 성취가 있었다. 실패로 돌아온 경험들을 떠올리며, 그물을 짜듯 작은 계획들을 만들고 앎을 낚았다. 부지런한 강태공이 되어, 과정으로서의 행복을 처음 맛보았다. 기꺼운 수험생활을 하며, 나는 내가 이전의 학교로 돌아가 같은 공부를 다시 하게 되더라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해 11월, 대입수능시험에서 넉넉한 점수를 얻어 마침내 원하던 학교의 학과에 들어갔다. 전공과목들은 실용학문에 가까웠고,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단편적인 지식을 외워 시험을 치르고, 모의 수업 발표를 할 때마다 고단하고 허전했다. 그럴 때면 본관 앞 길을 따라가다 계단을 서른 개 올랐다. 그곳에 거대하고 우아한 나의 성벽, 도서관이 있었다.
조잘대는 동기들과 그룹 과제를 마치고 고요가 필요할 때, 수백 년 전 현인의 사유가 궁금할 때, 시끄러운 나의 내면을 토닥이며 안아주고 싶을 때, 나는 책의 문을 열었다. 방 분위기를 살피며 기웃거리다 마침내 그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슬프고 아름다우며 짜릿하고도 막막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자주 울고 가끔 환하게 웃었다. 수업시간이 다가와 아쉬움 속에 책을 덮으면 강의실로 향하는 마음이 세수를 한 듯 말갛고 개운했다. 그 기분을 아는 자의 은밀한 자신감으로 내키지 않는 숙제도, 소통이 서툰 동기들과의 조별 회의도 으쌰, 힘내어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무리할 무렵, 홀로 머물던 성벽 밖이 궁금했다. 나와 같이 문학을 사랑하며 같은 꿈을 꾸는 동기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국어국문학과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소설론, 시론, 희곡창작 공부를 하며,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읽고, 작가들이 창조한 세계 속 인물에 동요되었다. 나희덕 시인의 시를 가르치다 눈시울을 붉히던 교수님, 동기가 쓴 희곡 대사 속 방언을 읽다가 함께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들. 주전공이 아니라는 은밀한 기쁨 속에 더욱 빛나는 세계였다.
문학과 함께 행복했던 4년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학사모 속에서 상상한 내 미래는 마냥 밝기만 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도서관에 들러 빌린 책을 반납했다. 그 고요하고 완전했던 공간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구석구석 걷다가 좋아했던 서가를 지날 때는 책등을 쓸어 보았다.
도서관의 거대한 품은 떠나는 나를 끌어 앉혀 머물게 하였다. 그런 다음 내 마음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나는 내게 다가올 삶의 굴곡들과 나를 가라앉힐 슬픔을 막연하게 나마 떠올려 보았다. 사회에 나가 마음으로 부딪혀 알아가야 할 관계들과 기약 없는 기다림, 피하기 힘들 후회와 절망에 대해. 그리고 나는 도서관에서 미리 위로를 받았다.
학교 도서관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새로운 곳에 길거나 짧은 여행을 가면 가까운 도서관을 찾는다. 생판 남을 가족으로 맞아 사랑하고 위하는 일이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몸에서 나왔지만 내 맘 같지 않은 아이를 키우며 답답하고 막막할 때, 욕심과 불안, 어디선가 들어박힌 조각난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릿 속을 빗어 가지런히 하고 싶을 때.
도서관은 여전히 우아하고 거대한 성벽이 되어 나를 내 삶의 가치와 고유함에 귀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중물로 나는 더욱 깊고 아름다운 세계를 퍼내어 내 것으로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