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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타령 3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챕터

by 차차
너희가 없었다면 어떻게 20년, 아니 3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챕터>의 대사 중에서-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영화의 줄거리 설명을 최소화 하였으나, 인물과 설정에 대한 간단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사고뭉치 브리짓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남자, 홀로 제인 오스틴의 시대를 살아가는 듯한 고집불통 신사이자, 내 여자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주먹다짐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 결국 먼 길을 돌아 시리즈의 3편의 엔딩에서야 브리짓의 남편이 된 마크 다아시. ‘브리짓과 마크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는 듯했던 이 로맨틱 시리즈가 9년만에 신작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챕터’로 돌아오며, 공식적으로 엔딩을 맞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나와 함께 늙어간’ 또다른 로맨틱 영화 시리즈 ‘비포 선라이즈-선셋-미드나잇’의 결말을 겪어 냈다. 아름답던 청춘의 셀린과 제시는 몇 십 년을 걸친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루고, 외롭고도 고단한 삶의 동지로서 갈등과 권태를 함께 나눈다. 그 결말은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기혼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준다. 찐 부부사이에서만 가능할 듯한 둘 사이의 역사 이야기와 거친 감정 표현, 여전히 지적인 재담. 시끄럽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과연, 파리지엔느와 (마침내) 파리지앵의 사랑답다.


비포 시리즈의 세계가 우아하고 재치있는 모딜리아니 그림을 닮았다면, 브리짓 존스의 세계는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처럼 선명하고 엉뚱하고 사랑스럽다. 런던에 사는 브리짓을, 한국에 사는 과거와 현재의 내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때론 조마조마해하며 응원하고 축하했다. 그녀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리며 언쟁을 벌이거나, 유머감각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세련된 캐릭터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브리짓은 자주 실수하고 주저하고 움츠러들지만, 마침내 용기를 내어 (때론 어쩌다가) 덤비고 뒹굴고 엉망이 되기를 마다치 않으며 살아가는 씩씩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곁엔 늘, 매력이 다른 두 남자와 넘사벽의 라이벌이 있었다.


“우리에게 밝고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다.”

마크 다아시의 추모식에 가는 브리짓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마크가 웃으며 등장하는 환영에 나는 브리짓의 마음이 되어 벌써 그가 그리워진다. 평일 오전, 아마도 가족들이 출근하거나 등교를 한 이후에, 설레는 마음으로 브리짓을 만나러 온 듯 나처럼 홀로 앉은 내 또래의 여성 관객들. 우리는 러닝타임 5분만에 함께 뺨을 붉히며 눈물을 닦는다. 브리짓 인생의 영원한 남주일 듯했던 마크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미스터 다아시가 안 나오는 게 실망스러워 영화를 놓치는 안타까운 관객을 붙잡아 보려는 시도일까. 배우 콜린 퍼스의 팬들에게는 다행히도, 브리짓의 그리움은 중년의 마크를 영화 속에 여러 번 불러낸다. 관객들의 소망처럼, 브리짓과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서 마크는 함께 살아간다.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지난 3편의 설정이 서운했을 배우 휴 그랜트의 팬들에게도 이 영화는 큰 선물일 것이다. 결국 ‘숨쉰 채’ 발견된 다니엘 클리버가 브리짓의 오랜 친구이자, 그녀의 자녀- 빌리와 메이블의 베이비 시터로 등장한다. 플러팅 솜씨만은 나이를 비껴갔지만,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찾아오고 말 년에야 가족의 빈자리를 느끼며,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다고 후회하는 다니엘. 그리고 마침내 그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브리짓.


“제대로 살겠다고 약속해.”

싱글 워킹맘이 된 브리짓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당부한 말대로 살고 있다. 그녀는 끈적이고 뜨겁고, 골치 아프고, 민망한 일들을 몸으로 부딪혀 겪어내며 삶을 움켜쥔다. 언제나처럼 제대로 사는 길은 쉽지 않지만 그녀는 명색이 로코물의 여주! 이번에도 그녀 앞에 두 남자가 등장한다.


오직 당신을 찾기 위해 데이트 앱을 깔았다며 수줍은 미소와 아름다운 몸 태로 여심을 홀리는 연하남 록스터와 세상이 규칙과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이과형 신사 스콧. 사랑이 배움과 성숙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사랑을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남자 사이에서 중년의 브리짓은 계속해서 성장하며 더욱더 그녀 다워진다.


“에너지는 변화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도 그렇다. 브리짓이 누구의 사랑이 되는 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녀와 두 자녀- 빌리, 메이블 마음 속에는 마크와 주고받은 사랑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장담한다.


“우린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말하는 ‘우리’에 과거의 서툰 나와 현재의 무딘 나를 슬쩍 끼워 넣는 것은 시리즈를 사랑해 온 팬들의 특권일 것이다. 나와 함께 성장하고 함께 늙어가며 함께 살고 있었던, 내 친구 브리짓이 내게 건네는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작별의 말. 또한 내가 그녀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마크가 없는 세상에서도 브리짓, 너와 너의 아이들은 괜찮을 거야. 그러다가 가끔 다정한 버전이 되는 무뚝뚝한 마크가 그녀에게 건네는 말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아내 브리짓, 괜찮을 거야. 내가 언제나 곁에 있을게. 나와 남편 중 한 명이 사별하게 된다면 또한 건네거나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여보, 당신과 아이들은 괜찮을 거예요. 차차랑 아이들은 괜찮을 거야.


아아 브리짓, 우린 이렇게 어른이 다 되었구나!


빌리와 메이블이 잠드는 방, 벽에 붙은 B와 M- 아이들의 이니셜을 보며 나는 브리짓과 마크를 떠올린다. 다음 세대의 브리짓과 마크가 될 자녀들. 그들의 사랑이 남긴 선물이다. 아들 빌리는 마크처럼 생각이 너무 많고 말수가 적으며, 딸 메이블은 브리짓처럼 꾀죄죄하고 엉뚱하다. 완벽하지 않은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어느새 나는 앞선 영화 ‘비포 미드나잇’의 대사를 떠올린다.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이게 맞아. 이게 진짜 삶이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건 진짜야.”


완벽하지 않은 삶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사랑에서 진정함을 느끼며, 마크를 보낸 브리짓도, 브리짓을 보낸 우리도, 다 괜찮을 거야. 나의 마음 속 너와 함께 잘 살아갈게. 고마웠어. 안녕, 브리짓!


P. S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시리즈 전편에서 브리짓이 벌인 그동안의 못난 행각들 (파이프를 탄 엉덩이, 바니 걸, 홀딱 젖은 원피스, 두 남자의 결투씬, 속옷바람의 눈 속 키스 장면까지!)과 그땐 미처 몰랐으나, 믿을 수 없이 젊고 아름다웠던 세 남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놓치지 말 것! 시리즈와 함께 늙어간 관객의 경우,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되어 지난 시절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다 눈물을 한바가지로 쏟으며 출구를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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