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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타령2

금명의 이야기

by 차차
열정도 유전이라고 얘네 집안 자체가 사랑밖에 난 몰라야.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극중 대사-


제주를 배경으로, 첫사랑을 이룬 소년-관식과 소녀-애순이 한 평생 극진하게 애정을 나누고 물려주며 또 간직하는 이야기. 친구 중 하나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전화를 했다.

“제주 사는 거랑, 평생 문학 소녀인 거. 그리고 사랑밖에 난 몰라인 거, 애순이랑 존똑(‘놀라울 만큼 똑같다’의 은어)이야.”

장한 인생을 요망지게(야무지게의 제주어) 살아낸 애순이의 삶에, 나를 떠올려준 것이 이추룩(이토록의 제주어) 큰 영광. 뒤이어 떠오르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하하, 근데 우리집은 관식이랑 애순이랑 반대지. 애순이가 관식이한테 사랑을 가르치느라 무지 피곤하네.”


나의 열정 유전자는 아빠로부터 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부모님 커플을 떠올린 건 그래서 일 것이다. 겨울이면 엄마 손을 잡아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바람이 불면 코트 단추를 풀어 작은 그녀의 몸을 감싸준다. 외출을 할 때면 20분 전에 나가 아내가 탈 때쯤 차 안의 냉난방이 완전하도록 완벽을 기하는 그의 에스코트, 집에 돌아오면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물티슈나 마른 걸레로 그녀의 신발을 깨끗이 닦아준다. 아내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고, 시집살이 한번 안 해본 아내의, 노모가 행여나 외로울까, 우리집에 같이 가시자고 얘기했다 여러 번 거절당하고도 포기하지 않는 남자. 매주 왕복 10시간 거리를 운전해, 영덕에 도착하면 처가집의 화장실과 부엌 청소를 꼼꼼히 해치우는 사람. 장모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동무를 자처하는 사랑꾼, 우리 아빠. 그러니까 극 중 인물 중 고르자면 나는 원래 애순이가 아니라 그들의 딸 금명이었던 것이다. 유난스러운 아빠 관식이를 보고 자라 아내에 대한 지극한 의전이 당연한 건 줄 알았던 딸.


극중 금명이는 두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한다. 그녀의 첫사랑은 온가족의 기대를 품은 남자, 영범. 금명이를 사랑하지만 부모가 주는 압박을 떨치고 그녀를 지킬 용기가 그에겐 없다. 무너지는 담 같은 그를 선택하기엔 금명이는, 차고 넘치는 사랑을 준 애순과 관식에게 미안해 마음이 아프다.

“니가 좋지, 그런데 나는 내가 더 좋아.” 부모에게 배운 대로 자신을 귀하게 대하는 그녀. 나를 지키고도 지속되는 사랑이 진짜라는 걸, 그녀는 스스로에게 뿐 아니라 영범에게도 가르치며 이별을 고한다.


두번째 남자는 오랫동안 금명이를 지켜보던 우직한 사람, 충섭. 그는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에도 금명이를 얻기 위해 장인에게 애써 애교를 부리는 그. 화가라는 꿈을 이룬 그는 이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바로 금명이 임을 알고, 마침내 그것을 얻어내고 지킨다.

결혼 후 집을 팔면서까지 금명이의 꿈을 지지해주는 충섭. 금명이 뭔가를 상의하자 웃으며 말한다.

“뭘 물어봐. 자기는 그냥 결정만 하면 되는 사람이야.”


그런데 솔직히 까놓고 이게 드라마니까 남자가 두 명만 나오지 싶다. 영범이랑 충섭이 같은 수려한 외모를 내려놓고서도 평생의 사랑을 찾는 건 내겐 말할 수 없이 고단한 일이었다. 소개팅도 여러 번, 헌팅도 여러 번, 이별도 여러 번, 엄마랑 다투는 것도 여러 번, 엄마 앞에서 괜찮은 척하느라 슬퍼지는 것도 여러 번.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꿈은 왜 ‘평생의 사랑 찾기’ 따위인 걸까.


잘 발달한 사회성과 성숙한 마음, 가꾼 외모와 훌륭한 취향, 높은 지적 수준이 다 있어야 되는 거 같고, 또래의 이성을 만날 수 있는 물리적 환경, 내 이상형을 파악하고 소개해 줄 나와 엄마와 아빠의 친구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체력과 시간. 젠장. 게다가 연애는 쌍방인데 이건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준비만을 나열한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를 존경하고 나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 최소 3번은 만나봐야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에프터 신청을 받을 만큼의 매력을 발산해야 하고, 아니다 싶을 땐 가차없이 이별을 고하고 다시 리셋되는. 그린라이트를 켜기 위해서는 에디슨 급의 도전과 끈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대학 때 놀러 나간 연합 동아리에서 서로를 만나 7년의 연애를 하고, 그러다 중간에 다른 사람도 만나고 그래도 결혼할 사람이 마땅히 안 찾아지자, 늘 엄마 해바라기였던 아빠랑 쉽게 결혼한 우리 엄마, 그것도 잘생긴 사랑꾼으로 얻어 걸린 엄마 뭐냐. 운 좋은 사람 따로, 애쓰는 사람 따로 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엄마와 달리 우여곡절 끝에, 운보다 훨씬 큰, 목표의식에 대한 투지와 인내로 나는 남편을 만났다.

충섭이 처럼, “자기는 결정만 하면 되는 사람이야.”라고 그는 말해주고, 나는 “고마워”라고 착한 아내 미소를 지은 다음에 속으로는 콧방귀를 뀌며 생각한다. 그래, 내가 다 하지. 주방 청소도, 육아도, 고양이 돌보기도 내가 결정도 하고 실행도 하고 관리도 하고 아주 그냥 1인 TF팀이지.


그리고 실제로 조금 고마워진다. 뭐든 안 투덜거리고 잘 먹어줘서 고마워. 엄마한테 혼난 애들 웃으며 안아주는 품이라 고마워. 동물한테 관심 없던 사람이 내가 업어온 고양이 두 마리 흔쾌히 받아주고 냥이 알러지 없어 줘서 고마워. 결혼 생활 10년, 엄마 아빠 사랑 넘치게 받아 눈높던 금명이는 투지와 인내를 훈련하여 장한 애순이가 다 되었다.


“늘그막에 뜨신 밥 먹으려면 뭐든 내 위주로 생각하고, 내 편 해라.” 고마워했다가 협박도 했다가, 오늘도 애순이는 충섭이를 관식이로 만드느라 피곤하다. 경험이 족쇄라고, 평생 애순이랑 관식이 닮은 꼴 부모를 보고 듣고 겪으며 주입식으로 사랑을 배워, 원대한 사랑을 꿈꾸게 되어버린 나의 하루. 결혼 후에도 이렇게 집요하고 고단하게 흘러가고 있다.


꿈을 이루는 고생길, 그 길에서 남편과 함께 만든 작은 행복들을 주우며, 내가 꾸린 TF 팀이 아주 그냥 반짝반짝 빛나도록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관식이 떡잎, 함 봐봐 너도 끼고 싶지? 니가 봐도 여기가 노다지지? 보면 탐나서 뭐든 애순이 위주로 애순이 편에서 잘할 수 밖에 없도록, 나는 오늘도 원대한 꿈을 이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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