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채집
지난 식목일, 나와 딸들은 고사리를 뜯었다.
고사리는 싹이 올라와 잎이 생기기 전까지, 매년 4월 초 중순으로 짧은 시기에만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에 채집 경쟁이 치열하다. 조금 알려졌다 싶은 곳은 이른 아침, 고사리 채집 전문가인 토박이 삼춘들이 훑고 가 마른 밭이 되기 때문에 나 같은 뜨내기와 그의 딸들은 생고사리 맛을 제대로 볼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라라북클럽 (아라동에서 열리는 월간 독서모임)의 너른들 선생님께서, 아는 고사리 밭이 있다며 고사리 소풍을 가자고 제안 해주셨다. 도민들 사이에선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주는 걸로 유명한 고사리 스팟. 아직 며느리를 안 본 서울 남자, 그러나 고사리 스팟을 알게 될 정도의 괸당과 연륜을 가진 너른들 선생님의 제안을 얼른 붙잡았다. 그리하여 온라인 학회로 바쁜 남편만 남겨둔 채 우리집 여자셋이 총출동하기로 한 것이다.
주말이라면 집에서 라면 먹으며 티비보는 게 최고라는 어른들의 비밀을 조금 알게 된 두 딸들도 흔쾌히 나설만큼, 고사리 소풍은 새롭고 매력적이었다. 딸린 식구 값을 하느라 김밥을 열 줄이나 (싸지는 못하고)사서 나서는 토요일 오전, 햇살은 따사롭고 하늘도 푸르다.
장소는 가시리 인근(상세주소는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줍니다), 마침 유채꽃과 벚꽃이 쌍으로 피어 아름답기로 유명한 녹산로 유채꽃길을 지난다. 작은 키로도 땅을 샛노랗게 물들인 유채 꽃밭 위로 빽빽이 줄 지어선 벚나무 꽃다발들. 미세먼지도 없는 남쪽나라의 주말, 이토록 황홀하고 한적한 꽃잔치라니, 이게 바로 제주의 봄 맛이지! 신이 난다.
네비게이션을 따라 좁은 길로 들어와 입력한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흙 길을 헤치고 한참 더 가야한다. 행정상 주소로 표시가 불가능한 너른 들판. 이곳이 바로 비밀의 고사리 밭이다. 무엇도 심거나 짓지 않은 오름 아래 초원. 그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 담담한 들판의 풍채가 믿음직스럽게 훤칠하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신비로운 만큼, 가시풀이나 진드기에도 무방비인 곳이라 나와 아이들은 오늘의 갑옷인 뻣뻣한 점퍼와 모자, 장갑을 야무지게 몸에 끼운다. 손잡이가 긴 에코백을 앞치마 처럼 목에 걸면 폼 좀 나는 고사리 패션 완성!
“조금 더 크면 쎄서 못먹어요.” 오늘의 고사리 강사, 너른들 선생님이 시범삼아 발 밑의 키 작은 고사리를 찾고 꺾어 가방에 넣자, 아이들은 여기 있는 고사리 모조리 뜯을 거라며 의욕을 불태운다. 여덟 살 세온이는 자기 키가 제일 작으니까 고사리를 제일 잘 찾을 수 있다며 의기양양하다. 보송보송 솜털을 품고 아직 고개도 못 든 채 풀빛으로 올라온 예쁜 고사리. 움켜쥐기 아까워 슬그머니 만져보다 고사리 손 딸들은 뭘 하나 살피니 벌써 저만치 가 있다. 북클럽 동료분들이 자기 손주마냥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고사리 있는 곳을 가리키니 두 딸은 경쟁적으로 싹을 뽑아 가방에 넣는다. 어른들이 어슬렁 걸어가는 방향으로 잽싸게 뛰어가는 녀석들,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르는 꼬마 생쥐들 같다.
들판의 고사리가 드물어 지자, 철조망을 넘고 가시덤불을 지나 새 밭을 찾아 탐험한다. 한참 따다 허리를 드니 이름모를 넝쿨에 가려져, 온 길을 찾을 수 없다. 돌아갈 길을 모르지만, 함께 온 동료들을 믿는다. 그들이 나와 내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거라고. 혼자 오면 큰 일 나겠구나, 그런 생각도 한다.
큰 아이 세인이가 먼저 지쳐 내 곁으로 와서 우리는 차가 있던 곳으로 먼저 돌아가기로 한다. 함께 맞다고 생각한 길로 나아가는데 처음보는 돌담이 나온다. “인아!!” 부르는 소리에 살펴보니 멀리, 동료분들이 우리가 온 반대 쪽으로 가야한다며 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챙겨주고 알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엉뚱한 길로도 마음 놓고 와 본 우리.
돌아온 길을 찾아 나오니, 온이가 너른들 선생님한테 안겨 가시덤불 밭을 지나고 있다. 진드기가 바지에 붙었다며 오도방정을 떨었던 모양, 손주 안 듯 팔을 내미니 얼른 안겼다고 한다.
“아이고, 선생님. 얘 이십킬로가 넘어요. 사모님이 걱정하세요.” 하고 함께 온 아내분을 살피니 너그럽게 웃고 계시다. 딸 둘을 낳고, 아이가 너무 작고 소중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안긴 딸의 모습에 이렇게 맘이 편하고 다만 감사하다니 조금 놀란다.
살다가 사람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 때 오늘의 마음을 기억해 낼 것이다. 같이 있어 든든하고 마음이 놓여 행복한 이 기분. 사람이 감사하고 반가운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지. 내 아이들이 원하는 곳을 마음껏 탐험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더 든든한 등대가 되어야지.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제든 그 때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해야지.
차로 돌아와 수확물을 보는데, 우리집 아이들 가방만 그득하다. 동료분들이 고사리가 보이면 따지 않고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양보해 주신 것이다. 때마침 이슬비가 내리자, 차박이 가능한 차량을 가져오신 분이 트렁크문을 열어 지붕 삼아 아래 돗자리를 깐다. 아늑한 점심 식탁이 생겼다.
푸짐하게 사온 김밥이 초라할 정도의 환대에 감사하며 오늘의 봄비를, 봄볕을, 봄꽃을, 고사리를, 내 어린것들에게 보내준 사랑을 함께 기억한다. 아이가 받는 세상의 사랑을 내 것처럼 느낀다.
숨어있다 봄 볕에 성큼 웃자란 고사리처럼 오늘 딸들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아이처럼 나또한, 이 봄의 모든 것을 양분 삼아 더 푸르게 자라고 싶다. 언젠가 땅으로 돌아가는 날 나또한 기름진 양분이 되도록, 떠다니는 사랑의 기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마음의 가방에 가득 담아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