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싸 Oct 21. 2021

싸고 귀한 코코넛오일과 현수막 도둑

'모리스 디페렌테' (다른삶) 21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로스팔로스 사방 천지에 널리고 널린 게 코코넛나무. 물론 나는 코코넛을 따러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을 직접 못하니 (따는 기술도 없고, 몸도 무겁고, 담력도 없다), 시장이나 앞 집에서 사서 먹는다. 나무에 올라가서 따는 법을 안다고 해도, 당연히 아무 코코넛 나무에서 마구 따 먹으면 안 된다. (주인이 있는 나무가 많으니, 무전취식은 안 됨!) 열대의 더운 태양 아래서 뜨겁다 못해 익을 것만 같은데, 두꺼운 껍질이 단열을 잘 해주는지 코코넛물은 항상 시원하다. 다 마시고 나면, 코코넛을 조각내서 하얀색 과육을 긁어 먹는다. 역시 무척 시원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 


언제 한 번은 코코넛 기름 짜는 것을 보러 간 적도 있다. 기계가 아닌, 완전 사람의 힘으로 짜는 데, 로스팔로스 시골 마을에선 다들 이렇게 많이 한다고. 

로스팔로스 중심가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마을에 갔었다. 코코넛 짜는 곳은 전통식으로 마른풀을 올린 지붕에, 사방이 트인 움막 같은 곳이다. 

우선 코코넛 껍질을 제거한 후, 하얀 속살(과육)만 깍뚝 썰기 해서 준비한다. 성인 3명, 아이들 5~6명이 다들 달려들어 과도나 카타나로 척척 써니깐 10분 정도 걸렸다. (코코넛 20개 분량) 이 깍뚝썰기한 코코넛은 분쇄기에 넣어 갈아, 부들부들한 가루/채 형태로 만드는데, 엄청 고소하고 맛있다. 이후, 조직이 성긴 천안에 이 채를 5~7주먹씩 넣어, 액체를 추출한다. 콩물이나 탕약 내릴 때 쓰는 배주머니 쓰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건만, 여기선 그냥 쉽게 구할 수 있는 쌀포대를 쓴다. 

액체 짜는 도구?는 분명 우리나라도 생활사 박물관 같은데 있을 것인데 이름을 모르겠다.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장비인데... 길이 1m 정도 되는 나무 2개를 겹쳐놓은 시소같은 형태로, 한쪽은 완전히 꽉 맞물려 있고, 한쪽은 주욱 늘릴 수 있다. 맞물린 면에 '코코넛가루 주머니'를 꽉 맞춰서 끼워 넣은 다음, 반대쪽 끝에서 사람이 나무토막 2쪽을 꾸욱 눌러준다. 단, 그냥 누르기만 하는게 아니고, 약간 비틀리듯 왔다갔다 문질러 주면, 반대편 끝의 "가루 주머니"가 눌려 지면서 액체가 추출된다. 5~6살 애들이나, 때로는 어른까지도 엉덩이 깔고 앉아, 앞뒤로 흔들흔들 해주면서 액체를 짠다. 이걸 몇 번 계속 해주면 '코코넛가루 주머니'에서 아주 뽀얀 색의 하얀 액체가 떨어지고, 주머니 안에는 한결 건조해진 가루만 남게 된다. 

이 하얀 액체를 가열해서 부글부글 끓여 거르면 코코넛 기름 완성!

가열하는 과정도 무척 재래식이다. 장작불을 때서, 그 위에 커다란 웍같은 냄비를 놓는다. 거기에 액체를 부어, 삽같은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다 6~8살 애들이 하더라. 연기가 눈 엄청 맵던데… 


대충 종합하자면... “일단 가루 형태로 만든 코코넛 채에서 액체 부분만을 추출한 후, 다시 가열을 통해 수분은 증발시키고 기름만 얻는 과정” 이다. 코코넛 20개 했는데, 2L 생수병 하나가 나왔다. 로스팔로스 시장서 사면 2달러 정도면 사는데.... 고생하는 거, 시간 들인거 대비 너무 가격이 싸다. 노동력이 너무 싸다. 하긴 여기 경제 사정을 감안하면, 구매력을 감안하면, 더 비싸게 팔 수도 없다. 


코코넛 착유에서처럼, 이곳에선 온 가족이 다 달려들어서 먹고 사는 일에 열심히 참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가족에 아이들 7~8명은 보통이니깐,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5~6살 정도되면, 농장 가서 밭일 돕고, 기름 짜고, 우물 가서 물 길어오고, 엄마 따라다니면서 리어카에서 야채 팔고, 광주리에 계란 이고 다니면서 계란 팔고, 어린 동생들 업고 안고 다니면서 보고... 애들한테 일방적으로 노동을 시키는 게 아니고, 모든 가족이 다같이 달려들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는 거고, 그래야 살 수 있긴 하다. 그래도 6~7살 짜리 애들이 그렇게 하는 거 보면 좀 짠하긴 하다. 내가 알고 익숙해온 곳의 애들이랑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싶어서, 그 간격이 참 크다 싶어서… 


물론 행복의 정도는 단순히 물질적 부와 신체적 편안함에만 기인하지는 않기에, 섣불리 “불쌍하다”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몸은 고될 지언정, 가족이 다같이 일하고 부대끼고, 아기들을 예뻐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주 놀러가곤 하던, 현지인 직원 분의 집도 아이가 8명이었다. 놀러가보면, 바우카우서 공부한다는 첫째 빼고 아이들이 다 있다. 1시간 좀 넘게 앉아있는 동안 계속 둘째, 셋째, 넷째… 줄 세우기를 하면서 얼굴과 이름을 익히려고 했는데, 아직 아기인 막내를 빼고는 영 헷갈린다. 막내는 아직 기어다니는 여자 아기인데, 생글생글 웃으면서 침을 흘리며 가족들 품을 왔다갔다 한다. 다들 뽀뽀하고 쓰다듬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람 수 만큼의 사랑을 듬뿍듬뿍 받는 게 눈에 보인다. 


아저씨네 집은 여느 로스팔로스 보통 집처럼 그냥 맨 시멘트 바닥에 나무로 벽을 둘러친 집이다. 처음 왔었을 때는 좀 충격을 받았고, 지금은 좀 익숙해졌다. 이전 같았으면 '혼자 심난한' 느낌에 젖어 있느라 놓쳤을 지도 모르는 것 - 창문 밖으로 보이는 기막힌 눈부신 녹색의 나무와 밭 풍경, 집 바로 앞의 풍성한 채소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수줍게 다가오는 아이들- 이, 지금은 골고루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모든 풍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서 버리려고 내어 놓았던 현수막을 나무벽에 바람막이로 꼼꼼하게 둘러 놓은 게 보인다. 

현수막은 여기에서 아주 유용하다. 여기 현수막은 꽤 두툼하고 무거운 소재로 만든다. 여기서 흔한 재료인 나무들로 얼기설기 세운 집 벽에 현수막을 둘러 놓으면, 바람도 막고 나름의 장식효과도 있다. 우리 사무실에서 만든 현수막도, 행사를 한 후 필요 없어져 밖에 내 놓으면 현지 직원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하신다. 

언젠가 한 번은 로스팔로스 한국어학교 주최로 한국영화 상영회가 있었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영화명과 일시, 장소가 적힌 현수막을 딜리서 만들어, 문화센터 근처에 걸어 놓았는데 하루 만에 없어졌다. 걸기 전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긴 한데, 막상 하루 만에 없어지니 한국어 선생인 K도 좀 허탈한 눈치. 


모든 물자, 특히 공산품이 귀한 탓에 이렇듯 알뜰하게 재활용 하는 것이 감탄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좀 파르르하다. 한국에서는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버려지는 현수막으로 에코백을 만드는 차원이라면, 여기선 기본적인 주거환경을 위해 필사적으로 이것저것 주워 활용한다는 차원이고, 이 차이가 아직은 너무 크고 다르기도 해,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물론 환경오염을 의식한 재활용의 가치가 덜 중요하고, 더 사치스럽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가 더 신경 써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버려지는 것을 재활용 해 “더 예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사용한다”라는 것에는, 어쨌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풍요가 깔려 있다. 예쁘고 실용적인 에코백은, 그 가치와 의의가 소중할지언정, 어쨌거나 소품이다. 반면 여기서는 강풍이 불면 그냥 날아갈 것 같고, 비가 하염없이 새는 집에 살기에, 훔쳐서라도 그 틈을 막고 싶은 것이 현수막이다. 

한 물건의 가치는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리라. 하지만 “훔쳐갈 것이 뻔한데 현수막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 단순히 그런 보편적인 차이로 매울 수 없는 답답함과 먹먹함이 느껴진다. 어이 없으면서도, 그렇게 훔쳐서라도 좀 더 아늑하고 바람 안 들고, 비 안 새는 집을 꾸미고 싶은 욕구가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소외로부터의 해방, 자연과 공존하면서 적절한 물질적 풍요를 모든 곳에서 최대한 '품위있게'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전 17화 구걸, 달달한 담배, 미세먼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