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기15 (2512 #인생과 계단 #종교와 신, 제사 #고향, 진해
김안나, 최윤영 <어느 아이 이야기 2025 을유문화사
Anna Kim <Geschichte eines kindes 2022 Suhrkamp Verlag GmbH
77생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 2013년에 읽는 1950년대에 태어난 혼혈 아이 입양 보고서 이야기
“이미 상처를 받고 혼란스러워했던 이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결정권을 되돌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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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소설보다 여름 2025 문학과지성사
2025년 여름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 김지연 「무덤을 보살피다」, 이서아 「방랑, 파도」, 함윤이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세 편과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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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라운즈, 최성옥 <호감의 디테일 2025 윌마 : 인간관계를 구원할 작고 구체적인 행동들
Leil Lowndes <How to instantly connect with anyone 2009 Leil Lowndes
카네기 인간관계론보다 실용적이라는 과찬도 있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고, 당신이 한 행동도 잊는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게 한 감정은 절대 잊지 않는다.”-Maya Angelou
‘비판에는 장황하고 칭찬에는 인색하다.’ 이거 내 말이네 반대로 하자, (난 자주 질타에 가까운) 비판은 짧게 칭찬은 길게.
“칭찬은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그래요
울 엄마가 아빠더러 하신 말씀처럼 이웃사람들에 하는 만큼만 나한테 해보슈. 그래 가족에 친절하자. 제발.
어찌 자식보다 제자에 더 맘을 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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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영 <시티뷰 2024 다산책방 : 우신영 장편소설
혼불문학상 수상작이 난 좋더라. 2023 문경민 <지켜야 할 세계>도 그렇더니 찐 현실적이고 섬세한 묘사
남자작가인 줄 알고 끝까지 익었는데 여자였네.
몸, 부도덕, 송도/도시, 면도날, 병원, 결국 속물에 관한 현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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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우치 유타, 김영현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2025 다다서재 : 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
近内悠太 85생 <世界は贈与でできている 2020 Uzabase, Inc.
수리과학 학사, 문학석사, 융합강사, 첫 책
니체 “증여하는 사람이 그 사실을 '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유타 “증여받은 사람의 뒤늦은 알아차림, ‘산타클로스가 사실은 엄마였구나!' 등등 증여받은 사람의 ‘상상력’과 ‘지성’으로 드디어 완성되는 증여
책 제목은 현실적인데 책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음. 썩 추천하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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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은 일기 2025 창비 : 황정은 에세이
약력(자기소개를 소설가로만 써놓고 24년 12월 3일 화요일 그날부터 25년 5월 1일까지의 일기를 냄.
계엄부터 시작, 제주항공 사건, 세월호 추모까지 내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 이렇게도 사회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니......
==최영건 <공기 도미노 2025 민음사 : 최영건 장편소설 : 오늘의 젊은 작가15
90생 연대국문과 학/석 여자 현재 원생
세대, 계층, 젠더의 갈등, 혐오의 안쪽, 자아의 바깥
각각의 관점에서 본 현실, 도미노 같은 사건과 불행
왠지 좀 더 나이 든 작가가 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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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아이들의 집 2025 열림원 : 정보라 장편소설
부커상,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 타임지 선정 올해의 책 등등 받은 천재작가의 글
로봇공학과 인공자궁, 양육, 돌봄, 입양, 학대
오늘도 그녀의 글은 읽기 어렵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렵고 상상 안되고... 결론적으로 무섭고 차갑다.
==찰스 램, 김기철 <찰스 램 수필선 2025/1976 문예출판사
Charles Lamb 1775~1834 <Essay of Elia
불우한 가정, 여동생이 엄마를 살해한 후 평생 독신으로 살며 동생 부양함
1825까지 회계원으로 동인도회사에서 근무, 45세 1820부터 필명 Elia로 월간지 ‘런던’에 연재한 수필 17편
열심히 읽었으나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이나 더 이해 안 되는 생활상과 글
#인생과 계단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이 줄어드는 것 같다. 점점 포기하는 책들이 늘어난다. 영화를 극장에 가야만 보던 시절, 이런 성격검사 문항이 있었다. 돈 주고 보는 영화가 재미없을 때 중간에 나온다? 안 나온다. 나는 절대적으로 안 나오고 끝까지 본다였다. 이건 비싼 레스토랑 가서 입맛에 안 맞는 음식 나왔을 때 안 먹는다? 먹는다와 같은 답이다. 난 어쨌든 먹어본다. 전자의 경우가 당연히 옳은? 아니 당연한 소린 줄 알고 살다가 어느 몇 년 연구실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중간에 관두면 돈만 버리는 거지만 끝까지 보면 돈도 시간도 다 버리는 것이다. 그때의 충격,.... 그 때문일까? 그 이전에는 책을 무조건 끝까지 읽었었다면 이젠 중간에 관둔다. 근데 다 좋은데 점점 무식해지는 것 같다. 참고 지나야 오를 텐데.....
내가 늘 강의에서 강조하는 화학의 활성화에너지와 끓는점, 물리의 문턱효과, 피아제의 인지발달단계처럼 인생이든 무엇이든 천천히 오르거나 내리는 게 아니라 계단식으로 급변적이라는 것. 죽어라 공부해도 안 올라요, 죽어라 연습해도 안 돼요. 아니야 그걸 참고 견뎌야 그 구간을 지나서 점핑하듯 다음 계단으로 오르는 거야
공부만 그러는 게 아니라 건강이나 인생도 그래. 무엇보다 오르막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내리막도 그러더라. 어느 순간 눈이 안 보이고 어느 순간 귀가 안 들려. 망하는 것도 서서히 망하는 것보다 팍, 팍 내려가는 거야
재산 모으기의 경우, 티끌 모아 태산이라기보다 죽어라 모아도 천천히 모아지는 게 아니라 시드 머니를 모으고 어느 순간 업, 또 업
버텨야 해, 더 버텨야 해.
근데 한편으로는 이런 다른 관점/사건도 있어
#종교와 신, 제사
교회이야기, 말이 되든 안되든 표현하자면, 세게 두 번 다녔고 크게 두 번 관뒀다.
1978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포도송이를 모아 간식도 얻고 선물도 얻으려고 진해 대야동 우리 집과 태백동 중앙초등학교 사이 성광교회를 다녔었다. 주일학교, 새벽기도까지 정말 열심히 다녔었다. 크리스마스 전야 밤샘행사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날개 달고 천사로 연극도 했었다. (난 정말 작고 까맣고 못생겼었다. 난 전교어린이부회장이었고 (무조건 회장은 남자만 할 수 있었던 세상, 당시까지 예외는 없었다ㅠㅠ 공부만 ‘아주(!)’ 잘했다..) 아주 열심히 다닌, 어쩌면 또래에서 가장 오래오래 다닌 어떠한 아이들보다 훨씬 열심히, 가장 성실히 교회를 다니던 어느 날, 오래 고민해 왔던 생각을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질문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극초반이었으니 대학생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전도사, 집사님, 장로님 심지어 목사님처럼 대단한 선생님인 줄 알았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진~~~~짜로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세요?”나는 솔직히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그건 **가 신앙심이 약해서 그래. 교회를 더 열심히 다니면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난 교회 다니기를 관뒀다.
난 누구보다 열심히, 더 이상 열심히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교회를 다니고 모든 예배와 찬양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점진 아닌 급변의) 계단이다’라는 내 특강 주제가 맞다면 더 다녔어야 하는 거였네 ㅎㅎ
하지만 교육 전문가로서 말하자면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공감으로 시작하여 (후략^^....... 이건 교육학 책 한 챕터 이상의 분량일 거다. 그쪽 저서는 포기했고 그냥 여생의 강의로 할 뿐.
#고향 진해
경남 진해시 (지금 창원시 진해구라니 너~~~~무 자존심 상한다. 창원은 1990년까지만 해도 시골이었고 그제야 허허벌판에 개발되는 길만 디립다 넓은 신생 도청소재지였다. 당시 대도시였던 부산만 한 마산의 일부가 되었다 해도 속상한데 창원 부속이라니 이거 원...하긴 대마산, 대제일, 대창신(학교이름들)을 촌스럽게 외치던 마산인은 더 속상할 지도.. 여하튼 진해는 무려 1950년대부터 도시였고 그때부터 이미 흙길 없이 죽죽 뻗고 깨끗한 아스팔트로 덮인 세련된 곳이었다. 당시 ‘시(市)’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ㅉㅉ 철저한 군인도시이고 외지인이 많아 사투리도 별로 안 쓰고 (우린 안 쓴다면서 마산 말, 부산말, 특히 진주말 촌스럽다고 흉봤는데 서울사람들에게는 모두 같이 들린다는 걸 알고 그 또한 억울했었다. 왜 이리 억울해한 게 많지?) 논밭도 없고 전 시민이 군인 아니면 상인과 교사뿐이던 곳, 신호등 없이도 헌병들이 멋진 포즈와 호각으로 모든 교통신호와 정리를 다 해주던 곳. 출퇴근길은 예술이었다. 지금도 그 광경은 많이 그립다. 아빠 출근하실 때, 전 식구가 “다녀오세요”, 퇴근땐 “인제 오십니까”였다. 희한한 인사말이다.
여하튼 난 진해시 여좌 3가동 858번지에서 태어났고 두 집 건너 844-7번지에서 자랐다. 대학입학으로 떠나올 때까지 살았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개발예정이라 다 퇴거되어 폐허 잡초지로 변해있다. 복개천 앞 골목끝집이었는데 그 언덕에서 흉터가 3개 생겼고 거기 우물에 막내가 빠졌을 땐 잠수부 울 아빠가 영웅처럼 건져 올렸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가끔 몸이 빠졌었고 연탄창고를 채우는 아빠모습, 쓰레기차 종소리를 듣고 버리러 가는 엄마, ‘셋방 있음’ 글씨 예쁘게 써서 전봇대에 붙이는 나, 국수 사러 막걸리 사러 ‘행길: 한길: 큰길’ 건너 뛰어가는 우리)
그러면 왜 또 교회를 다녔느냐? 이 글을 가족들이 읽으면 곤란한데... 아니 친구들이 읽으면 더 곤란한데...
그래도 하자. 1985년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당연 스카이는 너끈히 갈 줄 알았던 내가 학력고사를 폭망하고 선택한, 아니 아빠와 고3 담임에 의해 선택된 **리의 대학에 들어간 해. (당시는 선시험 후지원이었고 대학마다 학과마다 확실한 서열이 존재해서 전지만 한 이른바 ‘장판지’에 좌악 서열표가 나와있었다. 그리고 원서는 물론 수기였고 학생 도장은 기억이 안 나고 부모 도장, 담임 도장, 학교장 도장이 찍혀 오프라인으로 접수대에 시간 안에 달려가서 넣었어야 했다. 대학마다 아마 에버랜드 입장줄만 했을걸. 핸드폰도 없던 시절, 가족들이 흩어져 각 대학 접수대 구멍 앞에 줄을 서고 미리 작성한 원서를 한 장씩 들고 공중전화로 연락하면서 목숨 걸고 뛰어다니던 때였다.)
어떤 친구가 너무 좋았었다. 내 머릿속에 멋진 남자는 그야말로 ‘남자’여야 하는데 ‘말도 안 되게’ 걔는 노래도 하고 기타도 치고 심지어 동아리 당시는 서클이 합창반이었다. 남자가 말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못생겼거나 못됐거나 못살거나 그중 하나여야 하고 체육이나 음악미술은 당연히 못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노래도 잘했다. 그래 그 아이는 모태신앙의 가족일원이었다. 그 아이가 다닌 ㅅ*교회, 아직도 있을 거다. 눈으로는 빤히 보이는데 논길을 적어도 40분은 족히 걸어야 겨우 도착하는 신발 벗고 들어가는 마룻바닥의 작은 교회였다. 아직도 염소 낳았다고 송아지 낳았다고 감사기도 드리던 교우 할머니들이 생각난다. 사실은 그 친구가 좋아서 같이 가고 싶어서 주말마다 갔는데 몇 주 다니더니 그 친구는 서울 집으로 매주 올라가 버렸다. 나만 남았고 또 태생이 성실한 나는 계속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가 관뒀다. 목사님은 기억이 안 나고 나름 독실한 (몇 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 청년회장과 싸움까지는 아니지만 의견충돌이 있었다. 울 엄마 아빠가 지옥 간단다. 미신은 사탄이고 귀신 앞에 제사 지내는 모든 이는 지옥 간단다. 그래서 관뒀다. 당시 기독교인 모두가 다 그랬다. 조금의 양해도 없던 시절이었다. 재미있는 건 날 좋아하던 한 친구가 날 따라 그 교회 다니다가 무교 종손이었는데 몇 년 후 전도하러 외국까지 가는 신도가 되었다. 아마 지금 적어도 장로, 아니면 목사급일걸? 교장샘이다. 그 친구랑 두 달 사귀었나? 정말 착한 친구였지만 종손은 참을 수 있지만 농사짓는 집인 걸 못 참았다니 나도 참, 참이다. 첫 발령 난 시골학교 가서도 나 좋다던 동료교사도 몇 대인지 장손이었는데 엄마 안 계신 것도 막내가 초등학생인 것도 괜찮았지만 키 작은 털보이고 경상도인 것도 억지로 넘길 수 있지만 농사짓는 건 안 됐었다. 1989년이었다. 도시에서 자라고 (깡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걸 나중에 알았지만 고등학교만 보고) 행색이 비교적 세련된 돈 많은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돈 많아 보인) 재수생 출신이랑 사귀게 된 이유겠지. 지금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