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구석, 먼지 쌓인 나무 막대기
심지는 닳고 닳아, 짧아진 묵은 나무의 잔해
한때는 뾰족한 기백으로 백지를 갈랐건만
지금은 뭉툭한 머리로 침묵 속에 갇혀 있네
수많은 고민과 사랑, 복잡한 F=ma의 증명까지
나의 흑연(黑鉛)은 인간의 지혜를 대신했지
때로는 시인의 눈물을, 때로는 아이의 낙서를
지우개에게 지워지고 칼날에 깎여나가며 살아온 나
나를 잡던 손가락의 열기와 긴장을 기억하네
시험지의 행간을 떨며 달리던 경주의 순간들
사랑하는 이에게 건넬 편지 속 은밀한 고백까지
모든 결정과 망설임의 곁에는 늘 내가 있었지
이제 주인은 키보드와 터치펜을 사랑하네
'ctrl + z' 한 번이면 실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번쩍이는 화면은 완벽함만을 요구하는 세상
나의 부서지는 소리와 희미한 냄새는 구식이 되었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
쉽게 지워지는 게 쉽게 잊는 것이 아님을
내 흔적은 종이 위에 깊은 압력으로 새겨져
지우개로 닦아내도 미세한 결로 남아 있음을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무게와 기록의 진실 아니던가
늙은 연필의 마지막 기도
신이여,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잡아주소서
기억과 느림이 주는 진심이 필요한 순간
망설임까지도 솔직한 흔적으로 남길 수 있도록
나의 마지막 심지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기 전에
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문장 하나만 새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