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 Nov 30. 2020

[DAY78-80] 태어나서 처음 보는 뇌우

지수 일상 in Croatia


여행에서 돌아온 나의 자취방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뭐가 있어야 '냉장고 파먹기'라는 이름 하에 알뜰살뜰 해 먹을 텐데 해먹을 재료가 아예 없었던 나는 일요일이지만 다행히 오픈한 KONZUM 가서 닭가슴살과 카프레제(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 한 덩이), 그리고 내 사랑 파프리카를 먹었다. 한국에서는 잘 몰랐던 메뉴들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커진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렇게 해 먹는 삶을 살고 싶다. 간이 많이 된 음식이 아닌 최소한의 조리를 한 간편하고 건강한 식단, 생각보다도 나의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저녁부터 자그레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의 절반 이상이 비 소식이라니. 믿을 수 없다. 얼른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라는 무언의 압박인 것인가? 더 이상의 비는 안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내방 창문으로 바라본 공터(공사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공사를 시작하다 만 빈 곳이 있었는데 밤새 내린 비와 소용돌이처럼 불어온 바람 때문에 깔끔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편의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은 날아가기 직전까지 뜯어져 있었고 바람 때문에 나뭇잎이 온데 떨어져 바닥이 정신없게 보였다. 어쩐지, 어젯밤 내내 눈이 부실 정도로 수십 번의 번개와 귀가 찢어질 정도로 쩌렁쩌렁한 천둥이 울려 퍼졌고 미친 듯이 부는 바람소리와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날아다니는 소리까지.... 제대로 된 잠을 한 숨도 못 자서 몸도 마음도 피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눈을 뜨자마자 당일 아침 수업의 교수님한테 메일 보냈다. 하지만 이 교수님은 남달랐다. 날씨가 매우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자체적으로 휴강을 했다.(아무리 수업이 중요하다고 해도 날씨가 너무 안 좋아 괜히 밖에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나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나갈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다. 다행히 교수님도 금일 수업을 빠져도 괜찮다고 언급해주셔서 고민 없이!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 있기로 했다.



몰랐는데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검색해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난리가 네이버 기사로도 보도가 되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링크를 보내주며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왔다. 이야 인터넷 강국, 한국이 맞나 보다. 나도 자그레브 말고는 다른 지역 소식을 몰랐는데 꽤 심각했구나? 이로써 한 번 더 자체 휴강에 대한 명분이 생겼다.



학교도 안 가니 오늘 하루의 일정이 사라져 버려 오전 동안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다시 누워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점심시간이네? 뭘 해 먹을까 고민하다가 귀찮은 날에는 역시 계란 간장 비빔밥이지 하고 뚝딱 볶음밥을 했다. 간장을 넣으려고 하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굴소스가 생각나 중도 메뉴 변경을 했다. 처음으로 만들어본 레시피였는데 꽤 맛있었다. 국물이 없는 것이 굉장히 아쉬운 부분? 한국이었으면 편의점이라도 가서 인스턴트 미역국 사서 먹었을 텐데. 아쉽지만 꽤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교환 학생으로서 보내는 학기가 모두 끝난 후, 귀국 전 2주 동안 혼자 여행할 곳에 대한 사전조사 및 스케줄을 정리했다. 가지고 있는 자원(돈) 내에서 최고의 경험을 하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하지만 그래도 놀러 가기 위한 고민이다 보니 이것마저 재미있다. 사실은 돈 쓸 궁리 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여행지에 대한 수많은 선택지 중 결국 독일 베를린으로 첫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곧장 자그레브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까지 예매했다. 겁이 많은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때 보면 막무가내인 것 같기도 하다. 꺅 베를린이라니!



다음날, 비는 다행히 내리지 않았고 생각보다 많이 정리가 되어 시내는 걸어 다니기에, 트램이 지나가기에도 괜찮았다. 전날에는 비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걸어 다닌 사람이 날아다니는 간판에 맞아서 다쳤다는 기사까지 봤는데 그래도 많이 진정된 것 같았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매일 열리는 플리마켓?을 위해 세워둔 입간판과 포차 형식의 매대 일부가 날아다닌 것 같다.)



바람은 여전힌 많이 불고 온도도 낮아져 추웠지만 비는 조금만 내려 어느 정도 이동은 할 수 있었다. 집에만 있기에도 답답해서 룸메이트와 집 근처 카페로 나왔다. 건물 외벽을 공사하고 있어 철근과 안전망에 카페가 가려져 있어 사실 카페가 있는지도, 열고 있는지도 몰랐다. 구글 지도에는 뜨지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라 걱정했는데 너무나도 분위기가 좋았다. Korica. 카페 분위기도 여유로워서 너무 좋았지만 무엇보다 저렴한 커피 가격과 디저트 종류가 많아 마음에 들었다. 내 최애 카페가 될 것 같은 느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블로그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카페 스피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바로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 K-pop이 유럽을 강타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외국에 나가 한 번도 피부로 느끼지 못했는데...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가 문득 들은 노래 하나로 국뽕에 가득 차버렸다. 이곳이 좋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난리를 쳤더니 자그레브에서 만난 두 번째 동갑내기 친구, 지히가 연락 와 자기도 이곳에 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음 주에 이곳에 또 올 수 있는 명분이 생겨버렸다.



왜.... 나는 4년 동안 꼬박꼬박 등록금 내고 다니면서 한 번도 싸이 못 봤는데 하필, 왜 하필 내가 유럽으로 교환학생 나와있을 때 싸이가 학교로 오는 걸까? 아마 내 인생의 마지막 대학교 축제일 텐데 너무나도 아쉽다. 풀 죽어 있으니 한국에 있는 친구 한 명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공유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를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귀여워서 픽하고 웃었다. 투덜투덜한 보람이 있는데?



종강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 편까지 딱 2주 정도 시간이 남는다. 크로아티아를 벗어나 이리저리 여행 계획을 세우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서유럽을 갈까 하다가도 서유럽은 시간이 흘러 나중이라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비용적인 부분에서 부담이 되어 포기했다. 비행기와 숙소 등 걸리는 여러 선택지를 고려하다 보니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다시 못 온다는 생각으로 힘든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초점을 잡기로 했다! 그래서 결론은 베를린-(프랑크푸르트)-암스테르담-포르투-프랑크푸르트 일정으로 확정했다. 베를린에서 암스테르담 사이의 프랑크푸르트는 어차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으로 아웃하기 때문에 프라하를 함께 여행한 친구의 집에 30kg짜리 캐리어를 둘 겸 얼굴을 보러 가기로 했다. 꽤 알찬 계획을 세운 것 같아 기분이 뿌듯하다.



살짝 어디 수도원에 있는 메뉴인  같은데 먹는 나는  만족하면서 먹는 메뉴이다. 계란  알과 카프레제, 그리고 구운 빵과 잼까지. 아침식사가 아닌 저녁이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랑 카프레제를 먹을  있음에 행복하다.



유럽 대학으로 교환학생 오면 한 번쯤 꼭 해본다는 ESN카드 발급받기.... 신청해야지 해야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다가 결국 학기가 끝나는 도중에 발급받으려고 많은 항목들을 일일이 채웠다. 하지만 마지막 여행을 위해 할인받을 수 있는 부분도 없고 무엇보다 50쿠나가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일주일에 딱 한번, 금요일에 시간을 맞춰 신청하러 가야 한다는 점에 다 작성해놓고 다시 지우는 노가다를 했다. 그래도 '라이언 에어'를 탈 수 있는 국가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신청해놓는 게 이득이다. 아쉽게도 크로아티아는 공항 자체가 작아 국적기와 소수의 대형 항공사만 이곳에 들어온다. 라이언 에어 같은 LCC는 상상도 못 한다. 하여튼 교환학생이 되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나간다는 점이 좋으면서도 유럽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따금 슬퍼진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현실을 마주해야 하거늘.


작가의 이전글 [DAY77]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