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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02. 2020

[DAY83-85] 유학생 가방에는 소주가 있지

지수 일상 in Croatia


오늘도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등굣길은 또다시 우버가 책임졌다. 한국에서도 아르바이트할 때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주 택시를 타고 다녀서 갑또택(갑자기 또 택시를 탔다)이라고 친구들에게 불리곤 했는데... 자그레브까지 와서 택시(=우버)를 타다니. 습관이 되면 답이 없음을 알기에 친해지고 싶지만 멀어져야만 하는 사이로 남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원래 수업을 하지 않는 날이다. 하지만 막무가내인 교수님 덕분에 추가로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들어야 했다. 무려 6시간! 세미나 시간에 카페테리아로 가 우유가 들어간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하고 배는 안 고프지만 힘들어서 그런가 단 게 확 당겼다. 어쩔 수 없이 한눈에 봐도 달아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도 하나 먹었다. 역시 싼 맛에 먹는 카페테리아에서는 케이크나 감자튀김, 샌드위치, 피자 이런 건 먹지 말고 금방 만들어 줄 수 있거나 포장되어 나오는 것들만 먹어야 한다.(예를 들어 바리스타 아주머니가 바로 내려주는 커피라던가 마트에서도 살 수 있는 요거트종류?) 웬만하면 맛있을 법한 케이크도 그다지 마음에 들 만큼 맛있지 않았다. 나 그렇게까지 입 까다로운 편은 아닌데 말이다.



보강이라고 해서 일까. 삼사십 명 정도 되는 정원의 수업인데 비도 오고 6시간이나 하는 수업이라 학생들은 고작 10명도 오지 않았다. 분위기상 공부에 뜻이 있는 학생들 몇 명과 나처럼 쫄보 몇 명만 온 것 같다. 그만해주세요 교수님(제발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국어로 한국인 교수가 전공수업을 6시간 해도 진이 빠지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크로아티아 교수님이 영어로 전공수업을 6시간 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으면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할 것 같은 예감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일단 뭐라도 먹자. 음식이란 걸 해 먹을 기운도 없어서 결국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국에서 갈비탕이 문득 생각난 나는 간단하게 미니 밥솥으로 밥만 안쳐둔 후 빠르게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로 씻으니 그래도 피곤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머리를 말리고 나오니 밥도 다 되어 팩에 조리된 갈비탕을 데웠다. 역시 몸 온도를 올리는 데에는 탕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피곤하다고는 했지만 후식을 안 챙겨 먹는 것은 꽤 섭섭하다. 설거지까지 해 놓은 후 청포도를 씻어 먹었다. 행복하다. 학교에서 또 가져온 과제를 조금 하다 보니 또 저녁이 되었다. 저녁으로는 내 사랑 카프레제와 생 파프리카, 그리고 프라이팬에 볶은 버섯을 먹었다. 배불러서 계획했던 계란과 카프레제 반 정도는 입도 못 댔지만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먹으니 꽤 잘 살고 있는 느낌이다.

 


다음날, 전날 몸보신하고 건강하게 챙겨 먹으면 뭐하나 싶은 음식을 먹었다. 바로 짜파게티! 심지어 오일은 라면에 동봉된 올리브유가 아닌 친구가 가지고 있던 트러플 오일을 둘러 풍미를 훨씬 높였다. 고춧가루와 계란 프라이까지 포함된 짜파게티는 천국이었다. 스트레스받는 날에는 역시나 기름기가 좀 있는 음식을 먹어줘야 피로에 찌든 좀비에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나 보다. 짜파게티를 먹고 난 후 활기가 돌아왔다.

 


진정으로 기력을 회복한 나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집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있던 후배 지원이와 나는 갑자기 이렇게 조용히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서로 사는 집은 다르지만 이렇게 번개를 하면 곧잘, 금방 잘 모이는 것 같다. 오랜만에 자그레브에서 후배와 좋은 시간을 보낼 생각 하니 집 장롱에 숨겨두었던 작은 소주 한 병이 떠올랐다. 역시 유학생 가방 한편에는 소주 한 병쯤은 기본 아닌가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지갑 옆에 챙겨 집을 나섰다.



집으로 나오니 비가 조금 흩뿌리듯이 내렸다. 미스트 정도의 질감? 그래도 우리가 가는 길을 막을 순 없다는 생각에 마치 현지인인 것 마냥 비를 맞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사실 이번 번개에는 새로운 손님도 있는데 한국에서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온 스타벅스 바리스타도 우리의 번개에 참여했다. 동행으로 알게 된 분이라 어색할 수도 있었는데 이분도 우리처럼 꽤 말이 많으신 분이기도 하고 이야기하면서 관심사나 서로에게 궁금한 점이 많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해가 중천에 떠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오늘도 역시나 우리가 사랑하는 라들러와 함께 맥주에는 크레페라는 이상한 조합으로 주문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다. 헤어지기에는 아직 밤이 많이 남아있어 우리는 곧장 2차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펍으로 향했다. 골목에는 수많은 펍이 몰려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물담배인 시샤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담배 피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아빠가 내가 태어난 이후로 계속해서 담배를 피워왔기 때문이다.) 물담배만큼은 니코틴도 없고 맛도 선택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외국에서 나름 일탈을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에 고민하지 않고 시샤를 해보겠다고 말을 꺼냈다. 일단 우리는 음료와 함께 사과와 민트맛을 골라 시샤또한 주문했다. 일단 해 보니 나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 딱 한 번의 경험만으로 만족한다. 펍에서는 주로 샷을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내가 가져온 미니 소주도 생각이 났다. 펍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조금씩 따라 마셨고 오랜만에 마신 한국 소주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한국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크로아티아.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최소화하는 편이라 기분이 좋은 만큼 과음은 하지 말자는 생각에 술자리는 2차로 마무리했다. 펍이 모여있는 거리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옐라치치 광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왠열? 광장은 무슨 행사를 하는지 엄청난 규모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짐작 가는 바로는 광장 콘서트? 인 것 같아 나 또한 서서 아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계속해서 크로아티아로 된 노래만 흘러나왔고 멜로디 또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서 흥얼거리지도 못했다. 괜히 흥만 오른 나와 지원이는 배도 고픈데 맥도널드에 가서 뭐라도 먹고 가자는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도착한 맥도널드. 지원이가 일주일에 최소 3~4번은 가는 이 곳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흔한 맥도널드를 한국에서도 잘 안 가는 편이라 자그레브에 있는 이 곳도 이날 처음 방문했다. 너무나도 허기 진건 아니었지만 약간의 배고픔만 있어 간단하게 맥너겟과 감자튀김, 그리고 콜라를 주문했다. 왜 술만 마시면 배가 고픈지 모르겠다. 사실 이 핑계로 먹는 것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맨날 만나고 카톡으로 이야기하는 사이인 후배와 나는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맥도널드에서도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싸우지 않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알게 된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슈렉 팩까지 야무지게 했다. 하루를 아주 알차게, 야무지게 마무리하는 것 같다.



다음날, 이제는 익숙한 나의 주식이 된 바질 페스토 파스타. 양파, 파프리카, 소시지만이 이제 토핑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기에는 이 정도 재료면 충분하다. 여전히 맛있다.



그리고는 나의 마지막 여해지, 포르투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베를린 다음으로 (짐을 맡기러 들리는 프랑크푸르트를 제외하고) 암스테르담을 가는데 이곳도 그렇고 포르투도 마찬가지로 딱 나의 취향만을 담았다. 프랑스, 영국과 같은 서유럽도 물론 가보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여건도 그렇고 제한된 시간 동안 조금 여유롭게 한 도시를 여행하고 싶어 조금은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고 여행지를 골랐다. 앞으로 자그레브에서 보내게 될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여행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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