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일상 in Croatia
주말 전부터 속이 따끔따끔 아팠다. 정확하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작컨대 이틀 전 집에서 해 먹었던 라볶이가 문제였던 것 같다. 룸메이트가 한국에서 가져온 떡볶이 떡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내가 가져온 라볶이를 먹었다. 사실 대체품으로 해 먹었던 라볶이도 2~3일 정도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별 문제가 안될 것 같아 먹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다니. 속이 너무나도 쓰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는데 기말고사라 학교는 가야 했고 빈속으로 갔다가는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았다. 결국 엄마가 보내준 누룽지를 조금 해 먹었는데 그것마저 맛없게 끓여서 몇 입 먹지도 못하고 다 버리게 되었다. 혼자 살면서 아플 때가 제일 서럽다더니 맞는 것 같다. 엄마가 보고 싶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다녀온 나는 또다시 트램을 타고 옐라치치 광장으로 돌아왔고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수많은 사람들과 부스가 나를 반겼다. 어김없이 찾아온 알 수 없는 행사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보니 분위기 상, 눈치 상으로는 비건 행사 같았다. 궁금은 하지만 분명히 나는 먹는 것에 있어서 도전하지 않는 성격이라 안 살 거니까 멀리에서만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집에 있는 재료를 끌어 모아 파스타를 해 먹었다. 아침부터 속이 불편하다 보니 소화하는데 부담스러울 수 있는 면보다는 파프리카와 버섯을 더 많이 넣어 그나마 건강하게 만들었다.(사실 소시지도 넣어 먹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리락쿠마'와 관련된 콘텐츠가 유명하다고 해서 하나 골라 봤는데... 노잼에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 내 정서(웃음코드)와는 맞지 않아 잠시 보다가 패스를 해 버렸다. 밥을 먹으며 볼 콘텐츠를 고른다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보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은 느낌?
내일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는 날이다. 내일 시험만 치고 나면 다음 주 월요일에 있는 시험은 딱히 준비할 게 없어서 다가오는 주말에 혼자라도 크로아티아의 지방인 로비니에 다녀올까 고민했다. 갈까 말까 고민할 때는 확신을 갖기 위해 날씨 어플을 찾아보곤 하는데 하필 또 주말 날씨는 환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슬프게도 버스 시간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 시험기간에는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걸까? 창 밖으로 바라본 자그레브의 하늘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맑았다.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에 울적했는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는 사람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동행으로 만났던 한 오빠는 한국에서 취업해 폴란드에서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해외에서 혼자 살다 보니 나처럼 한국 음식을 잘해 먹고 있는데 나와는 차원이 다른 어나더 레벨인 것 같다. 일하러 온 게 아니라 백종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처럼 음식을 만드는 데에 너무나도 진심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꼬리 수육이 웬 말인가?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메뉴였다. 뭔가 재밌어 보이는 음식 만드는 과정 구경하는 걸 뒤로하고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니. 너무나도 하기 싫었던 걸까. 침대에 기대 프린트물을 보다가 으응? 갑자기 내 방 전등의 불이 나가버렸다. 거실로 나가보니 부엌이나 룸메이트 방의 불은 멀쩡한 것 같아 다행이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 연락하라고 집주인이 있는 거겠지 하며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얼른 해결해주세요 집주인님?
다음 날, 두 번째 시험인 Tourism principles를 두근대는 마음으로 치러 학교에 갔다. 중간고사 때 한번 '헉'할 정도로 난도가 높은 시험 수준을 경험해서 그런지 기말고사 때는 더욱더 긴장되었다. 그 결과는? 걱정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더 어려워서 헛웃음만 나왔다. 울그락 붉으락 하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나와 지원이는 학교에서 유일한 마음의 쉼터였던 카페테리아로 곧장 달려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지원이는 맥주를 마셨고 마음만은 같지만 위염이 도져버린 나는 코코아로 놀란 가슴을 달랬다. 너무 웃기다. 이번에도 술을 마시고 세미나에 들어간 지원이는 순식간에 과제를 하고 학교를 벗어났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하기도 힘들었던 나는 오늘은 특별하게 Good Food에 가서 룸메이트가 자주 먹던 샐러드가 생각나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 곧장 포장해 왔다. Crunch in love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샐러드는 사실 건강하지는 않다. 튀긴 부드러운 닭고기와 아보카도, 양상추와 삶은 달걀 등 조금은 불량하지만 단백질이 가득한 이 샐러드는 약간 건방진 게 특징이라 너무나도 맛있었다. 한 끼 식사로는 든든하다는 걸 넘어 배불러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분했다. 밥도 먹었고 스트레스받을만한 어려운 시험도 지나갔는데 속이 아픈 건 여전했다. 결국엔 지원이에게 SOS를 쳤다. 어머니가 의사이셔서 지원이는 한국에서 다양한 비상약을 챙겨 왔는데 위경련(또는 위염)이 심한 나를 위해 약을 나눠 주기도 하고 복용법에 대해 설명도 대신 전해 주었다. 지원이와 지원이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하루였다. 약을 먹은 후 한숨 자고 나니 속이 많이 나아졌는데 역시 아플 때는 약 먹고 쉬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시험을 망쳐서 빡침이 안 풀렸던 지원이는 결국 수다를 떨어야겠다며 나와 룸메이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아 물론 지원이네 집에 가서 먹는 게 아닌 남(=요리사)이 만들어주는 맛있는 바깥 밥! 시내에 위치한 곳으로 집 근처에 있어서 한 두 번씩 지나쳤던 곳인데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어서 괜히 신기했다. 나를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술을 시켰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주스를 주문했다. 하하 맛있네. 짜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또다시 배가 아플 것 같아 나는 간이 거의 안된 볶음밥(사실 이것도 사이드로 주문한 것)을 조금 먹었다. 맛있는 것들을 앞에 두고도 많이 먹을 수 없어 슬펐지만 그래도 분위기나 함께한 사람들이 좋아 행복했다.
밥을 다 먹고 쇼핑을 가자는 지원이와 룸메이트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학교나 Konzum에 갈 때 매일 지나는 광장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 동상이며, 나무며 하나같이 다 낯설게 느껴지는 거지?. 3개월 만에 만나는 듯한 낯 섬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어서 그런가? 자그레브의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