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일상 in Croatia
오늘은 성적처리 때문에 학교에 가는 날이다. 사실 급한 건 아니었지만 지원이가 미리 크로아티아를 떠나기 때문에 서류처리를 하는 김에 나도 한꺼번에 성적처리를 하기로 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이 주룩 흘렀다. 대프리카라고 불리는 대구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더운 거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대구가 덥다고 했을 때는 다른 세상이라고 혀를 찼던 거 같은데 자그레브도 만만치 않은 미친 곳이다. 너무 덥다. 덥기만 하면 말을 안 할 텐데 이 나라 사람들은 덥지도 않은지 에어컨을 안 틀 뿐만 아니라 커피도 따뜻하게 마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는 크로아티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맥도널드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조를 부탁했다. 직원이 익숙지 않은 요청에 당황하긴 했지만 내 상태를 보고는 곧장 오케이를 해 주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후 10분 만에 얼음이 모두 녹았다.(아이스 전용 컵 또한 없어서 따뜻한 음료 담는 컵에 마셨다. 그래서일까 컵이 아주 촉촉했다.) 우여곡절 끝에 세 과목 모두 pass를 받은 동시에 INDEKS와 학생증을 사무실에 제출했다. 이로서 학교에서 처리해야 하는 행정 절차는 모두 끝났다. 교환학생 신분을 벗게 된 것이다.
땀을 쫙 빼고 도착한 집. 나름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점심으로 먹고 싶었다. 오늘 길에 우연히 발견한 빵집에 들러 오랜만에 참치 샌드위치를 포장해 와 맛있게 먹었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먹는 도중 룸메이트가 학교에 갔다가 귀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꽃 한 송이와 편지 한 개를 건네주었다. 사실 헤어지기 전에 편지를 주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농담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진짜로 주다니? 카네이션 한 송이와 편지를 받으니 괜히 정말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오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고마워 선아야.
크로아티아로 처음 왔을 때만 해도 2월이라 한창 추울 때였다. 그래서 가져온 짐들이 모두 무겁고 부피가 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약 2주 정도 여행할 계획이 있던 나에게 겨울 옷들은 모두 짐이 될 뿐만 아니라 비행기를 탈 때는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돈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번거롭고 비싸더라도 우체국에 들러 소포로 붙이기로 했다.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택배 상자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터라 상자를 따로 구입할 필요는 없었지만 무게 때문이지 9kg를 찍고 약 1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지불했다. 한국만 하더라도 무게당 돈을 지불하는 형태라 9kg에 해외배송인 것을 감안하면 꽤 괜찮은 금액에 소포를 붙인 것 같다. 휴 크로아티아를 떠나기 전 해결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해결해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워서 친구와 함께 옐라치치 광장 근처 젤라또 집에 왔다.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산책을 하거나 한인마트에 갈 때마다 항상 지나쳤던 곳이라 괜히 익숙했다. 오늘은 색다르게 민트 맛! 역시 민트는 맛있다. 자그레브에서 약 4개월 정도 살았는데 그동안 기념품 하나를 못 샀다. 돌아가기 전 한 번쯤 기념품 쇼핑을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보다. 뭐를 살까 골목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구경하면서 고민했는데 역시 술만큼 호불호를 가리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전통술(라끼야)을 구매했다. 가게에 들어가 시음까지 해보면서 결정했는데 전적으로 내 입맛으로 골라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만 마실 것 같기도 하다.
하나는 해결했고 마그넷이나 엽서를 하나 사볼까라는 마음으로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날씨가 갑자기 바뀌는 건 유럽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빗방울이 얼마 안 떨어지긴 해도 우리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터라 곧장 집으로 돌아왔고 도착한 후 한 시간도 안되어서 비가 폭풍으로 내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천둥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하늘이 아주 말끔하게 개었다.
놀란 속은 감자탕으로 달래주었다. 정말 나도 놀랍고도 신기할 정도로 한국음식의 레트로트화는 다양한 것 같다. 크로아티아에서, 심지어 한인식당도 아니고 집에서 감자탕이라니? 이게 다 룸메이트가 한국에서 싸온 식량인데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다음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한국에서부터 룸메이트 어머니께서 오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부터 집안을 청소하기도 하고 집이 좁아 어머니께서 지내실 숙소를 따로 정했어야 하는데 그곳의 위치와 상태까지 미리 보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처리를 어느 정도 끝내 놓고 나서 우리들의 최애 카페로 향했다. Amelie. 평소와 달리 이제는 올 수없다는 생각에 1인 1 케이크를 주문했고 룸메이트는 아이스크림까지 추가로 주문했다. 유럽에 살다 보니 이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직접 제조해야 하는 수준이라 이번에도 역시나 에스프레소와 얼음을 주문했다. 캬 맛있다.
룸메이트 어머니가 오신 후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 유명한 녹투르노, 아마 자그레브에 교환학생으로 온 사람들 중 내가 가장 늦게 이곳에 와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너무나도 실망했다. 서비스가 정말 말 그대로 개판이다. 애피타이저 다음으로 메인 음식이 나오기까지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중간에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나왔고 뒤늦게 나온 음식의 맛도 짜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음식을 치운 다음 계산하기까지도 약 2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유럽이 아무리 여유롭게 기다리는 문화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처음일세? 룸메이트 어머님을 모시고 온 첫 레스토랑이 이런 식이었어서 괜히 내가 창피했다. 우리 자그레브(애)가 그렇게까지 나쁜 곳(애)은 아니에요 엉엉.
다음날, 자그레브에서 보내는 마지막 오후. 오늘도 여전히 옐라치치 광장은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북적북적했고 날씨 또한 화창하다.
화창하다 못해 너무나도 더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맥도널드에 들렀다. 사실은 현금 쿠나가 없어 카드를 쓸 수 있는 만만한 곳이라 온 것도 없지 않다. 한 가지 팁이라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유로를 사용하지 않는 크로아티아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것이나 카드로 결제하는 것이나 수수료는 비슷하다. 따라서 현금만 사용해야 하는 매장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카드로 결제하는 편이 더욱 깔끔할 것 같다. 잔돈도 안 만들고!(셀프 계산대가 아니면 잔돈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드물다)
짐이 너무나도 많은데? 겨울 옷부터 시작해서 자그레브의 짐을 소포로 꽤 많이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캐리어가 옷과 짐으로 꽉꽉 차 버렸다. 20kg와 기내용 캐리어에 차곡차곡 잘 정리했는데도 불구하고 남는 자리가 거의 없다. 이 짐들을 들고 독일까지 날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막막하다.
머리 아프더라도 일단 먹고 생각하자는 신조대로 식탁에 앉았다. 룸메이트는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한다고 전날 미리 짐을 다 빼고 집을 떠났다. 그래서 마지막 저녁은 쓸쓸하지만 혼자 먹게 되었다. 계란 한 개와 소시지 두 개, 그리고 육개장까지 있는 식사는 꽤 푸짐했는데 사실 캐리어에 육개장 레트로트를 넣을 공간이 없어서 먹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맛있으면 뭐 하나, 뜨거운 국과 프라이팬에 막 구운 소시지와 계란 프라이를 먹으려고 하니 너무나도 더웠다. 땀이 너무나도 나서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겼다. 아까워. 내일이면 크로아티아를 완전히 떠나는 날인데 시원하면서도 섭섭하다. 언제 또다시 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