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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Oct 09. 2020

[DAY9] 자그레브 현대미술관 가는 날

지수 일상 in Croatia


구름 한 점 없는 화장한 날씨, 이런데도 집에만 있다면 바보 멍청이인 게 틀림없을 정도. 학교도 안 가는 날이라 혼자라도 길을 나서려고 했는데 마침 룸메이트 선아도 학교가 일찍 끝났다. 트램을 타고 조금 멀리 떠나려고 하니 설렘뿐만 아니라 나와 선아 둘 다 데이터가 부족한 게 일상인 탓에 길을 잃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트램을 타고 새로운 길을 가며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걱정보다는 신기함이 불쑥 모든  신경을 무디게 만들었다.

 


'사바 강'이라고 불리는 이 강은 자그레브 아랫동네에 있는 강이다. 구글 지도로 볼 때는 매우 크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보니 대구 신천의 반 정도밖에 안되었다. 애걔? 너무 작고 귀여운데? 심지어 이 자그마한 강을 타고 어디로 이동할 셈인지 작은 보트도 나루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 강의 끝은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해졌다.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맞닿아서 그런지 국경이 아닌 강, 산과 같은 자연의 일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대한 경계가 신기했다.



트램이 도로 중앙에서 이동하는 탓에 서울의 버스 정류장처럼 어딘가를 가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이 곳 자그레브는 그렇게 넓지도 않은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지하도로를 이용해 건너야 했다. 왜지?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는데 3분이면 건널 것을 수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니. 빨리빨리를 중시하는 코리안으로서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도로 시스템이었다. 지하도로 내려가는 입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

!!

밤에 오면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다 털릴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지하도가 우리를 반겼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거대한 그래피티를 봐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분위기에 쫄아서 주황빛 조명에 앞서 가는 착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놓칠 새라 재빠르게 그들을 쫓아갔다. 그래피티 천국을 흠뻑 느낀 순간이다.



이 동네는 내가 사는 도심보다 현대적인 건물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상대적으로 칙칙한 건물이 많은 중심부와 컬러풀한 이곳의 컬러가 오묘하게 느껴졌다. 한 동네 아닌 것처럼? 자그레브를 떠올리면 화사한 것 같으면서도 회색빛 도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주차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주차장 모습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오는 길에 공사판도 있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의아했지만 자그레브에서 공항 다음으로 가장 세련된 건물임은 틀림없었다. 자그레브에서 이렇게 감각적인 건물이라니. 전시를 보지 않았지만 벌써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특별전

Josef i Anni Albers



시각장애인들이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할까?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갈 때마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없었다. 그저 관람하고 사진 찍기 바빴을 뿐. 하지만 이번 특별전시에는 작품 모양 그대로 판화가 바로 아래 있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손끝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금은 머리를 맞은 것 마냥 띵 했다. 문화콘텐츠개발융합전공을 잠깐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한때 큐레이터가 전시를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왜 이 부분은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 단순히 어떤 구조로 전시를 구성해야 관람객들의 만족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제자리만 맴돈 것이다.

 


끈을 통해 모양과 더불어 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특별전에는 촉감을 주로 사용해서 전시를 다른 시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끈, 판화, 물, 소리,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전시를 제공하여 자그레브 현대미술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RED POEM

작고 작은 성냥갑에 섬세한 그림을 그려 빨간색으로 일부분만 강조한 점이 인상 깊었다.



현대미술관답게 3층 높이의 슬라이드도 한 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이용객이 많지 않아서일까. 당시에는 이용이 금지되어 있어 못 탄게 너무 아쉬웠다.



작품명과 작가, 연도 등 최소한의 정보만 안내되어 있어 작가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없었다. 도슨트에게 설명을 조금이라도 들었더라면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궁금증만 가득 안고 전시를 관람했다. 알듯 말듯한 현대 미술의 세계인 것 같다. 사실 그 맛에 현대미술관을 들리는 것도 있다. 해석된 것을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게 아닌 혼자만의 해석으로 추측해보기. 그게 또 시간이 술술 잘 가기도 한다.



문득 관람하다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지도를 발견해 작가를 확인하기 위해 네임택으로 몸을 돌렸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이라니. 비디오 아트만 알고 있었는데 정적인? 전기가 통하지 않는 작품도 발견하게 되어 매우 신기했다.

 


다양한 콘셉트를 가진 전시실이 있었지만 이 곳은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 안내판이 있어 주목을 끌었다. 읽어보니 아이들에게는 부적절한 작품이 다수 있다. 그러니 적절한 안내가 필요하다.(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말자라는 의도가 아닌 부모의 충분한 해설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였다.) 이 경고 안내판을 볼 때부터 우리는 짐작을 했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교 걸인 우리말이다. Mine is bigger than yours라니.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



??

Tit box라니. 저 박스는 하나도 안 보이고 저게 진짜인지만 궁금해졌다. 그리고 Bob Watts라는 사람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검색해보니 1988년도에 돌아가셨던데 살아 계셨다면 작품의 의도에 대해 한번쯤 물어보고 싶다.





여성과 관련된 작품이 상설전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고 있었는데 커다란 포스터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여성의 눈빛과 조금은 공격적인 글씨체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얼굴을 석고로 본뜬 수많은 마스크들이 모여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편의 폭력 속에서도 사는 여자, 믿었던 남자와의 성관계 이후 에이즈에 걸린 여자, 그런 와중에 임신을 해서 아이 또한 에이즈 보균자가 된 사연 등.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얼굴이 가득했다. 이 곳에 있던 사연을 모두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들이 처한 삶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아파졌다. 그리고 이 사람들 말고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았나, 아니 아름다운 것만을 보기 위해 그 너머를 무시하고 살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현대미술관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이곳이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돋보기로 봐야 할 정도로 작은 작품



수많은 미술 관련 작품을 모아 둔 공간. 마치 한 작가의 작업실 같았다.



땅바닥에 놓여있던 책도 예술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던 작품. 아직도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



현대 미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며 둘러보았더니 이곳에서만 무려 3시간을 있었다. 현대 미술은 시간을 훌쩍 보내게 만들지만 체감은 3분의 1 정도로 느끼게 만들 만큼 흡입력이 크다. 이번에도 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간다. 에휴. 하도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관람을 마친 후, 근처에 있는 복합 쇼핑몰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발견한 한 티셔츠. 행복과 용? 중국인을 타깃으로 만든 것처럼 붉은색 투성이었지만 이곳은 자그레브. 중국인 관광객을 잘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한문으로 된 중국풍의 티셔츠라. 오리엔탈리즘이 뚝뚝 떨어지는 티셔츠라 팔릴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이랬는데 베스트셀러이면 어쩌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트램을 기다리다가 본 자그레브의 아파트. 한국의 경우 건설사마다 프리미엄을 한 스푼 얹은 듯한 외벽의 색과 브랜드 이름에 무심코 지나가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은 단순한 회색 벽이 다다. 그래서일까. 아파트 뼈대보다는 각 집마다 어떤 빨랫감을 내놓았고 에어컨 실외기를 달았는지, 차양을 설치했는지에 대해 구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장인 것 같은 느낌은 지우기 힘들었다. 닭장 느낌은 자그레브가 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은 것 같다.



현대미술을 관람하다 보니 점심을 의도치 않게 거르게 되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르고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배가 너무나도 고파서 룸메이트의 나눔 덕분에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쨍쨍한 해가 뜨는 유럽의 햇살 때문인 걸까. 너무나도 달고 맛있었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장 보러 마트에 가면 나도 방울토마토를 사 와서 한 대접으로 먹어야겠다. 미술관에 다녀온 게 피곤했을까. 룸메이트 방이 한참 조용하더니 잠들었나 보다. 아직은 살만했던 나는 혼자서 뇨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떡볶이 자체도 처음이었지만 뇨끼라니. 그래도 네이버 블로그 야매 레시피를 참고해가며 만들었다. 설탕도 없고 마늘도 없어서 많이 빈약했지만 나름 맛있어서 다 먹었다. 그래도 떡볶이는 떡으로 만드는 게 제 맛이다. 아 시장 떡볶이랑 오징어 튀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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