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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Feb 06. 2022

12. 펫스톤을 아시나요

                    사막화되어 가는  일상

반려견 반려묘에 이어 반려식물은 이제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 때문에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강아지를 아기처럼 안고 때론 어르며 어서 이 한 평도 안 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기를 바라는 이웃이 흔하디 흔하다. 이웃의 반려견에 대한 예의를 티브이에서 알려주기도 하는 세상. 이들만의 장례식장도 납골당도 그리고 이들의 타고 남은 뼈를 작은 보석처럼 만들어서 오래오래 함께한다는 이야기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반려견과 반려묘에 대한 비교 분석한 글도 이제는 흔하다. 반려견은 주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온갖 애교를 온몸에 장착하고 반려묘는, 주인이 반려묘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름 하여 집사! 주인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 때는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보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더 사랑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반려견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고양이와 함께 사는 나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을 기르는 일. 그러니까 공간을 나누며 사는 일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반려식물은? 굳이 말하자면 나는 반려식물과 함께하고 있다. 우리 집에는 20년이 되어가는 화분이 있다. 볼 때마다 대견스럽고 그 20년간의 우정이 깊었는지 행여 누렁 잎이라도 생기면 마음 모서리가 쓰리다. 하지만 물을 주고 간간히 영양제를 투여하는 이상의 관심을 쏟아붓진 않는다. 진짜 가족에게 무한 사랑을 쏟아붓지 않듯이 공기처럼 마시며 내뱉듯 공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반려식물 역시 관심을 거둬 버리면 시나브로 내부의 생명을 잃어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관심이 주 영양소는 아니어도 필수 영양소임엔 틀림없다. 사랑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그래, 관심이라고 하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듯 살아 있음과 죽음 사이, 관심이라는 미지근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시멘트 덩어리로만 된 네모 반듯한 공간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삭막한가. 그렇다면 그곳에 화분 하나를 놓아보자. 비로소 햇빛과 바람이 느껴질 것이다. 식물은 그 존재로 공간을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든다. 우리 집에는 동백도 있다. 연둣빛 단단한 봉우리를 삐집고 핏빛 붉은 점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뿌리로부터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려 폭죽처럼 터뜨리는 날 꽃은 필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는 나는, 오가며 동백의 부풀어지고 연해지는 꽃봉오리를 눈으로 애무한다.


그런데!

요즘엔 펫스톤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라고 한다. 분양하다면서 돈을 받는다. 판다는 얘기를 그렇게 고급지게 한다. 앵커인지 아나운서인지 중년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며 묻는다

‘스톤이 자라나요? 어떻게 기르나요?’

젊은 여자가 대답했다.

‘저희가 분양하면서 매뉴얼을 드립니다. 그곳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더 궁금해진 남자가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한두 가지만 ….’

젊은 여자는 엔서 링 머신처럼 매뉴얼을 드린다는 말만 반복했다.      


요지는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하고 그 대상으로 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일기를 떠올렸다. ‘그럼 일기를 쓰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 금방 생각을 거두었다. 일기는 관리가 필요하다. 누군가 볼 수도 있기에 진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기 어렵다. 그래서 두리뭉실 뉘앙스만을 풍기며 변죽만 울리고 만다. 그래서 심리 치료사들은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적은 다음 그것을 태우던지 찢어 없애라고 한다. 후한을 없애는 것이다. 생각이 이쯤 되고 보니 왜 사람들이 자신의 대화 상대로 돌을 선택하는지 알 것도 같다. 후처리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커다란 잇 점! 그러나 그러한 잇 점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제는 속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도 사치가 되어 버린 듯하여 못내 쓸쓸하다. 세상이 어딘가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어어어! 하는 사이 나 역시 밀려가고 있다.


요즘은 누군가 붙잡고 자랑질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가림막이 쳐진다.

‘재미없다!’

그만 하자는 짧고 강한 멘트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자랑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슬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자랑을 들어주자니 내 처지가 누추해져 마음이 편치 않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니 기가 빨린단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하가 어려운 이유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그러니 너무 좋은 이야기도 너무 슬픈 이야기도 아닌 금방 잊어버려도 무방한 스몰토크가 대세다. 자꾸만 사람들 속에서 사람으로부터 멀어진다.


사는 일에서 물기가 빠지고 있다. 버석버석 해진 일상에 메타버스에 올라타라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죽는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이미 물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깊은 고랑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몸에 주름이 늘어간다.  주름 사이로 시간의 강이 유장하게 흐르기라도 하듯이 … 이왕이면 그곳에 사랑이 흘렀으면 좋겠다. 범람하지 않을 정도, 딱 그 정도만.


있는 그대로를 말해도 자랑질이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세상, 차라리 입을 닫고 차돌처럼 단단한 돌을 문지르며 애환을 달래나 보다. 자랑질도 푸념질도 제 몸에 축척해 열매를 매다는 뿌리식물처럼! 우리는 자꾸 안으로 단단해져 간다. 펫스톤이 가져다준 단상이다. (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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