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역사하기, 두 번째

정조 책문 토론_환곡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무엇인가?

by 은열

흔히 헬조선이란 말을 많이들 쓴다.

물론, 그것이 현시대에 대한 부조리나 부당함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왜 '헬대한민국'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조선이 후기로 갈수록 정치의 세태가 나빠지면서 근대화의 흐름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조선이야말로 엄청나게 행정화된 나라였고 '민본주의'를 제대로 추구했던 시기에는 무엇보다 복지를 강화하고 정치권력의 견제가 제대로 이루어졌던 나라임을 이해한다면 굳이 '헬'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조금 불편했다. 조선이라는 전체적 역사적 상에 비해서는 그 용어가 다소 비역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말기적 상황만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때로는 심지어 '헬조선'이라는 용어를 되씹다 보면 '조센징'이라는 용어까지 떠오른다. 그래서 오히려 이게 맞는 용어 사용인가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역사교사로서의 나에게는 다른 측면의 접근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조선이 생각보다 행정력이 대단했고, 백성들의 삶에 그 나름대로는 진심이었던 나라라는 것을 안다면 학생들도 조선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지는 않을 수 있겠다고. 우리에게는 조선이라는 역사 자체에 대한 역사적 관조와 평가가 필요할 뿐, 그것을 현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이입할 필요까지는 없을 거라는 문제의식을 심어주자고 말이다. 과거를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마침 나의 5~7월 프로젝트 수업의 주제가 '기아와 기근'이었다. (나는 거꾸로 캠퍼스에서 근무 중이기 때문에 모듈별로 주제에 따른 교육과정을 내가 짜서 진행한다. 2모듈의 주제가 '기아'였다.) 정치와 기근, 기후와 기근에 대해서 다루면서 조선시대의 기근 문제와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다루는 시간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다룰 때에는 박영서의 "시시콜콜 조선 복지 실록"을 상당 부분 참고하고 함께 읽었다. (아래도 대부분 해당 책에서 주요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조선은 민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먹고사는 부분에는 생각보다 예민하게 대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은 보통 기아가 발생할 때에는 진휼, 무료급식소 사업, 환곡의 세 가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백성의 구휼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진휼은 천재지변이나 기근이 발생했을 때 해당 지역의 사람들에게 곡식 등을 지급하는 사업(지금으로 따지면 재난지원금)이고, 환곡은 역사시간에 늘 배웠듯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정부가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 가을에 갚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료 급식소 사업은 시식(施食)이라고 하여, 떠돌아다니는 유민이나 흉년이 들 때마다 발생하는 기민을 대상으로 '진제소' 혹은 '설죽소'를 설치하여 진행한 무상급식사업을 말한다. 조선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수혜 대상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현물을 지급하거나 세금의 면제 혹은 감면 혜택을 주기도 하였으며, 환과고독의 상황에 따라 아동복지, 노인복지, 여성복지, 장애인복지, 노비 복지로 나누어서 실행한 예들이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수업시간에는 조선의 기근 구제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젝트의 두 번째 차시와 세 번째 차시에는 위에서 소개한 책의 일부를 읽고 여기에서 내밀고 있던 주제를 가져와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1. 숙종 때 발생한 국무회의의 현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흉년으로 인해 한양으로 모인 대규모의 유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일단 설죽소를 확대하여 이들을 구제할 것인가? 다른 방안이 있는가?


2. 환곡의 문제는 정조 때에도 이미 대두된 바 있었다. 정조가 이를 해결하고자 과거시험 시제로 내민 책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열심히 토론하고 나누는 친구들.


첫 번째 주제에서도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 주제였다. 박영서의 "시시콜콜 조선 복지 실록"에 실린 책문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환곡은 곡식이 흔해도 내주고, 곡식이 귀해도 거두어들인다. 또한 곡식 값이 올라도 거두어들이고, 곡식 값이 내려도 내준다. 이렇게 매해 그 이익을 취하면서도 기근과 풍년 여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입법 취지와 전혀 다른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째서인가?
- "홍재전서"'책문' / 박영서, "시시콜콜 조선 복지 실록"(98쪽)


사실 좀 힘을 주려고 했던 주제였고, 환곡의 제도적 시스템과 지방관의 상피제부터 시작해서 향리들이 어떻게 지방행정을 운영했는지에 대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하다 보니, 실질적 운영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해 많이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사수업에서는 흔히, 삼정의 문란과 환곡의 문제점에 대해서만 다루고 끝나는데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직접 생각해 보거나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방행정의 시스템에 대해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보자는 고민을 던져본 수업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아이들도 새로운 대안을 고안해 본다는 것에 나름 열심이었고, 돌아다니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선시대의 세밀한 행정체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해를 해야 새로운 대안을 고안해 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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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토론 답변. 한 시간동안 열렬히 토론을 했다 ㅎ


지나치게 간단하고 피상적으로 설명한 교과서보다, 해당 시대의 시스템을 자세히 설명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인터넷으로 다른 자료를 더 찾고 방안을 고안하다 보니 진지한 수업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질문도 많았고, 나도 즉석에서 찾아보고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고, 책을 다시 찾아보면서 의견을 나누는 활발한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엄청나게 참신하고 반짝이고 역사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해당 시대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 마지막 차시에서 이런 문제를 현대사회에서는 어떻게 해결할지 시민적 차원으로 고민하는 시간에서 하나의 배경 지식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수업이 엄청나게 역사적인가? 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도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는 없다. 역사적인 수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사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역사적인 수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확답을 못하겠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역시 대안을 고안할 때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으로 바라보기는 했다. 다만, 나는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이번 수업은 조선의 행정 체계를 다시 생각하고, 조선의 복지 정책을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되짚어 볼 수 있게 한 수업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그랬다. "생각보다 조선이 꼼꼼했네요? 복지에 생각보다 신경을 많이 썼구나!"라고. 그래! 나도 책 읽으면서 솔직히 많이 배웠다. 역시 조선의 행정 체계란!


그래서 역시 책이 중요하다. 이것도 읽고, 저것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배움은 항상 부족한 법이다. 다 안다고 자신해도 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의 뒤통수를 치니까. 수업시간에 함께 본 책은 마지막의 "다시 여는 글"도 너무 좋았다. 시간이 부족해 이걸 같이 읽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다. 이 수업에 대한 글은 다른 블로그에도 미리 올린 바가 있었는데, 15차시 프로젝트 전체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링크한다. (https://blog.naver.com/njsj85/222802337395)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수업이어야 재밌지 않을까?! 주구장창 스토리텔링만 하는 것보다야?! 돌아보니 역시 난 이런 수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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