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보여서 생각지 못했던 함정.
평생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마음도 그렇게 늙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변화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는 정도였을까. 사람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정중해졌고,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한 번 더 생각하는 듯한 눈치가 보였다. 먼저 양보하려 하거나, 말을 고르는 듯한 모습들이 늘어났다.
변화를 확실히 느끼게 된 건 몇 가지 구체적인 사건들 때문이었다. 직장에서 상사가 던진 말이 첫 번째였다. “10년 넘게 하셨는데 그 정도밖에 못하세요?” 누구나 인정하는 빌런이 하는 말이라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지만, 가스라이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 속에 담긴 ‘경력자에 대한 기대’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 현실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일자리를 구할 때도 예전과는 다른 벽을 느꼈다.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실해졌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건 저렴한 인재였고, 나는 어느 새 그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친구의 솔직한 말이었다. “그래도 나이 차이가 나서 대하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 그 한마디로 깨달았다. 아, 내가 이제 ‘연장자’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구나.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도, 운동할 때 원래 잘한건 아니었지만. 더 약해진 퍼포먼스도 노화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마음은 여전한데 몸은 정직하게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어려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갭이 더 혼란스러웠다. 겉보기는 젊어 보이는데 실제 나이나 경력은 꽤 많은 것이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편하게 대하다가 나이를 알고 나서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 생각보다 나이가…” 하면서 급하게 존댓말로 바꾸거나 조심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런 순간마다 ‘아, 내가 이제 그런 나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연장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부담이었다. “이제 내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나?” “뭔가 더 잘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실망시키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들이 자꾸 들었다. 예전에는 그냥 편하게 실수해도 되고, 모르는 것도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10년 넘게 했는데…“라는 기대치가 생기니까 더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아, 내가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구나. 연장자로 대우받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책임 지고 싶지 않아서인가.
연장자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나이 먹는다고 완벽해지는 건 아니고, 여전히 배우고 실수하고 성장하는 사람인 것이다. 노화는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저항하기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는 게 나을 것 같다.
흰머리나 체력 저하를 받아들이자. 20-30대 때와는 다른 방식의 매력과 강점이 생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젊을 때 없던 경험, 깊이, 여유, 판단력 같은 것들 말이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로 오래 살아왔다. 이제느,ㄴ “나이값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연장자로서의 역할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경험 많은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기쁘게 여기려고 한다.
완벽한 연장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경험 많은 평범한 사람으로 있어도 괜찮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부담 내려놓고 편하게 가자. 어차피 나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모든 것은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