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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r 31. 2016

'공간의 공유'

영화 '맨, 우먼 & 칠드런'

 한때는 조직에서 갈등의 원인이 '소통의 부재'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주 만나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많이 해야지만 그 모든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요한 만큼은 대화를 했었다. 대화는 효율적이었고, 갈등의 원인을 찾고, 해소하기 위해서 작동했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터질 갈등은 터져버렸고, 살아가는 것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로 해소할 수 있는 고민이 있는가 하면, 홀로 버텨내야 하는 고민도 있다는 것을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었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로 대화를 했는데, 그것을 소통이라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요즘엔 참 쉽게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수단들이 많이 생겼다. '소통'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지낸 4년 전과 비교하면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SNS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처음 내가 소통의 고민을 하던 옛날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SNS가 더 많아지고난 이후에 사회적으로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이 '진짜' 이야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하다 와서 피곤해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 나는 뭔가 털어놓을 적당한 상대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것은 사람을 참으로 괴롭게 만든다. 때로는 그래서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예 생판 모르는 남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대화하는 사람이 내 상황을 잘 모르더라도 말이 통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팀 무니도 대화가 필요했다. 어머니가 가정을 떠난 이후로, 그는 활약하던 미식축구 팀에서 나오고 오로지 게임에 빠져서 수많은 시간을 그 안에서 보낸다. 팀의 아버지는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게임만 하면서, 미식축구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들을 걱정했지만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는다. 운동을 그만두려는 팀 무니에게 코치는 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감독은 나머지 팀원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그에게 한다. 감독이나 코치나 각자의 입장이 있었겠지만, 팀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과연 그런 말이었을까?


 영화는 보이저 호의 모습과 함께 시작한다. 그 보이저 호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대를 위해서 59개의 인사말, 키스 소리, 파도 소리,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부는 소리, 심장 박동 소리를 담고 머나먼 우주를 항해한다. 처음에 보이저 호가 어떤 우주선인지를 봤을 때에는 그것이 하는 일이 꽤나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선의와 희망으로 가득한 우주선이 아니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거 같기도 했다. 보이저 호는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대와 이어지길 바라면서 아무도 없는 공간을 항해해간다. 처음 생각해봤었다. 그 우주선은 얼마나 쓸쓸할까. 2013년 9월 27일, 보이저 호는 태양계를 벗어났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진입을 앞두고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은 우리가 있는 공간의 모습이었다. '푸르디푸른 점 하나'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공간에 대한 보이저 호의 대답이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터무니없이 넓은 공간 속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하나의 점이었다. 보이저 호는 그 점과 다른 점 사이를 잇기 위해서 계속 우주라는 도화지를 가로지르고 있는 중이다(잘은 몰라도 아직까지 그러고 있을 것 같다). 내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공간에 자그마치 60억이라는 인구가 바글바글하게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 작은 공간이 눈 앞에 있었다. 설명하고 싶어도 그럴 단위를 찾기가 힘이 들었다. 좁쌀이라는 표현조차 과분한 문자 그대로 점 하나 크기의 행성.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공간에 사는 허무함이란 참 오묘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대화하는 것도 이런 모습이랑 비슷했던 것 같다. 하고 싶던 이야기를 했을 때 가끔 뭔가 이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보이저 호가 누군가를 찾아서 이어지고 나면, 그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다. 이 거대한 공간에 삶을 공유할 누군가가 생겼다는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을.

난 당신과 이어지길 고대합니다

 고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외로워한다. 산다는 게 보면 '공간을 공유'하는 것인데, 서로 겉도는 느낌이 들 때에는 정말로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주변 사람들을 보면 항상 누군가가 말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슬픈 때는 아무 말도 없어서 어색해지는 순간이 아닐 것이다. 침묵 또한 대화의 일부다. 누군가 말하면, 누군가는 들어야 하니까. 대화를 하면서는 항상 줄 수도, 항상 받기만 할 수도 없다.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는, 혹은 서로 듣기만 하다가는 '대화'는 무산된다. 작디작은 이 푸른 행성에서 같이 살자고 하는 행동의 첫걸음은 진부할지 모르는 자기소개와 취미, 특기의 공유다. 그 소개들은 좁은 공간 속에 있긴 하지만, 나를 좀 받아달라는 소리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자식들은 자식들 나름대로 서로의 공간만 확인한 채로, 공유된 삶을 산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현실적인 영화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내 생활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극이 끝나고 천천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메시지가 마음에 닿기를 고대하면서.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맨, 우먼 & 칠드런', '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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