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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r 17. 2016

치열한 현실 감각

루쉰의 글을 읽고 나서

 과제 때문에 ‘아Q정전’을 읽고, ‘광인일기’를 읽고, ‘노라는 집을 나간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글을 읽었다. 좋은 내용이 담긴 책을 읽을 때에도, 나랑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쉽게 지루해했었는데 이 사람의 글은 단 한 순간도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재미도 있었고, 오래간만에 깊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들어줘서 너무나 좋았다. 글들을 보고 감상하는 것에 있어서 오래된 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 광인일기를 읽어볼 때에는 그의 글을 필사하면서 읽었다. 짧은 분량이라서 필사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글이 좀 짧아서 집중하기 쉬웠는지, 쉽게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광인일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생생히 기억난다. 아Q정전을 읽었을 때에는 무덤덤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아Q'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노라는 집을 나간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글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글들이 하나같이 100년이 넘는 나이를 먹은 글들인데도,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훨씬 현실적이라서 놀랐다.


 루쉰이 처음부터 글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의학도를 꿈꾸던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는 과정 중에, 마음을 바꿔 메스 대신에 펜을 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 방황하던 순간에 루쉰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일세.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이 곤히 잠들고 있어.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다 질식해 죽어버릴 걸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는 거니까 죽음의 슬픔은 느끼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자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들을 깨우면, 그들 불행한 사람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하도록 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그의 친구인 진신이는 루쉰에게 눈 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방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 대답이 루쉰을 흔들었다. 어떤 마음을 먹고 생각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쉰은 그 대답을 듣고 펜을 든다. 그렇게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광인일기’이다. 이 작품에는 루쉰이 글을 쓰기 전에 했던 바로 그 고민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해설을 듣기 전에는 ‘과연 이 사람이 광인인가?’하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선뜻 그를 광인으로 몰아세울만한 근거라고는 광인들의 특징 중에 과대망상이 있다는 것이지만, 그의 망상증은 일기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읽어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 글 안에서 광인을 광인으로 만드는 것은 형의 증언 말고는 없었다. 형과 동생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형이 외치는 ‘저리 가! 미친 사람 보는 거 처음이야!’하는 말 이외에는 그가 광인인지 확실하게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나는 형이 동생을 구경하러 온 사람을 쫓아내는 이 대목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결국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 미친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광인이 찾아본 수천 년의 역사를 담아낸 책의 구절구절마다 배어있는 ‘식인’이라는 풍습이 광인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에 미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구조나 제도보다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부분을 짚어보고 싶다. 다르다는 것을 끄집어내서, 틀리다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전히 타인의 혐오 어린 시선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올바른 것도 틀리게 만들 수 있음을 책에서 경계하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광인’의 자세였다. 그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아이들을 구해야만 한다.’는 말을 써놓는다. 광인은 사람들의 그 시선을 감내하며, 새로운 희망인 ‘아이들’을 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광인의 광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일. 그것 뿐이었다. 그 광증을 해소하지 못했던 광인은 아마도 그가 두려워하던 대로, 4000년 역사의 제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인의 도덕'이라는 글자 사이사이에 끼어있던 희생자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글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루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글은 1923년 12월 26일. 북경 여자고등사범학교 문예회에서의 강연을 적은 것이다. 그는 헨리크 입센이라는 작가의 희곡인 ‘인형의 집’이라는 작품 속 주인공인 '노라'를 통해서 본인의 생각을 말한다. 노라는 집을 나가고 어떻게 되었을까.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며 집을 도망쳐 나간 그녀에 대해서 입센은 아무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죽게 되면서 완전히 열린 결말로 남게 되었다. 노라에 대해서 어떤 이는 결국에 나중에는 집에 돌아온다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녀가 집을 나간 후에 살 길이 막막해서 타락해 유곽에 들어가고 말았다고 했다. 루쉰은 이에 대해서 이치대로 따지면 정말 노라에게는 그 두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새장 안에 있는 한 마리 새를 들어 그는 말한다. 새장 안에 갇혀 있으면 물론 자유가 없지만 새장에서 나오고 보면 밖에는 수없이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는, 결국에 살 길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다. 루쉰의 말은 다른 어떤 사상가들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는지, 본인의 주관에 대해서 덧붙여 이야기한다.

 돈이란 말은 매우 귀에 거슬립니다. 혹은 고상한 군자들한테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사람들의 공론이 어제와 오늘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식전과 식후가 종종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무릇 밥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돈소리를 하는 것은 비천하다고 하는 인간들의 위를 눌러보면 그 속에서는 틀림없이 채 소화되지 않은 고깃점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하루 굶긴 후에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루쉰은 이런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 대신에, 현실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신기했다. 고전 소설을 쓰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옛날 사람들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독 루쉰의 글은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거의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바로 옆에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살 길이 없는 그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직 살 길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에 가장 요긴한 것은 그를 꿈에서 깨우지 않는 것입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이하는 일생을 괴롭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임종에 앞서 그는 자기의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 하느님이 백옥루를 지어놓고 나에게 와서 낙성식의 글을 지어달라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며 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들, 한 젊은이와 한 노인, 죽는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중 죽는 사람은 기쁘게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음 놓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거짓말과 꿈의 위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령 길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꿈은 절대 꾸지 말아야 합니다. 아르치바셰프는 그가 쓴 소설에서 미래의 황금 세계를 꿈꾸는 이상가를 보고 힐문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를 창조하려면 우선 많은 사람들을 깨워서 고생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신들은 황금 세계를 그들의 자손들에게 약속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에게는 무엇을 줄 작정인가?”하고 힐문했습니다. 준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큽니다. 그 희망을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서 자기의 고통을 더 깊이 느끼게 하며 영혼을 불러 깨워 자기의 썩은 시체를 목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거짓말과 꿈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찾지 못했을 경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꿈이지만 그것은 미래에 대한 꿈이 아니라 목전에 대한 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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