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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Jul 02. 2016

냄새 생각

 냄새를 글로 풀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에 비해서 향을 표현하는 말들은 단조로워 보인다. 어쩌면 이는 '냄새'가 다른 감각들에 비해서 함께 공유하기가 참 어렵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00 향, 000 냄새'로 설명하는 것을 다른 형태로 돌려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그 냄새들을 돌려 표현하는 말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이 향기는 이렇게 부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의 방식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냄새를 감각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인이 직접 체험해보고 느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언어가 만들어지는 그 상황에 '냄새'를 특정하는 표현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예민하게 냄새를 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냄새는 강렬하지만, 이내 몇 분만 지나면 그 냄새에 대한 기억은 잊히고 만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냄새이든 말이다. 지독한 비린내든, 지린내든, 꽃향기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지만, 코는 지속되는 자극에 쉽게 무뎌진다. 냄새는 체험의 언어다. 장미 가시에 찔리고, 그 꽃잎의 부드러움에서 흘러나오는 향을 맡는다. 물로 손을 씻어내고, 비누를 문대어 향을 마신다. 그 냄새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오는 것은 개인의 체험이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향수'에 등장하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궁극의 향기를 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루누이는 수많은 공간 속에서 다양한 냄새를 감각한다. 하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그루누이가 마시는 향기가 느껴질 리 만무하다. 그래서 감독은 시각 효과의 압도적인 강렬함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그루누이가 태어난 곳, 찌든 비린내가 느껴지는 파리의 어시장은 온통 회색빛이다. 그에 반해 향긋한 냄새들이 만개하는 들판들은 색색으로 향을 수놓고 있다.


 예전에 한번 탈취제를 쓰다가 그 이름에 꽂혔던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페브리즈 에어인데, 그들의 향 표현은 무척이나 독특하다. 페브리즈 에어는 '맑은 하늘 바람', '봄의 소생', '비 내린 초원', '산뜻한 정원'같은 설명으로 향을 표기하고 있다. 냄새를 대상이 아닌, '상황'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기분 좋은 냄새를 느꼈던 기억을 되살려 보는 것. 그 기억 속 장소가 어느 곳이었는지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사실, 처음 저 명칭을 봤을 때에는 조금 어색했었다. 왠지 모르게 간질간질하고, 오글거리는 표현처럼 느껴졌다. 일반적인 방향제 스타일인 '라벤더향', '장미향'처럼 쓰여있는 게 아니라 생소한 표현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 탈취제의 이름에 강한 영감을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충제를 썼었다. 살충제는 오렌지 향을 머금고 있었고, 파리를 향해 분사하고 나서도 향긋하게 느껴졌다. 파리가 주변에서 너무나 시끄럽게 오갔던 터라, 짜증이 날 만큼 나 있었고 나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살충제를 뿌렸었다. 그때, 살충제에 맞은 파리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파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허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만화에서 보던 장면들과는 사뭇 달랐다. 만화에서 살충제를 맞은 곤충들의 죽음은 상당히 짧고 간결하게 나오지만, 실제로 보니 그 장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파리는 전력으로 허공을 질주하며 방 안을 쏘다녔고, 제 속도를 가늠하지 못한 채로 벽에 부딪혔다. 몇 번을 그렇게 부딪히고 나서, 힘없이 툭 떨어진 파리는 바들바들 거리면서 천천히 향에 취해 죽어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든 생각이 '파리와 사람의 죽음을 동일 선상에 둘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내 앞에서 바르르 떨며 죽어가던 파리는 조용히 형광등의 온기를 쬐고 있다가 그 날갯짓 소리가 듣기 싫다는 이유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어떤 존재의 죽음은 정당한 이유 없이,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왔다. 파리는 바닥에 떨어져서도 끈질기게 윙윙거리고 있었고, 이내 소리는 사그라들었다.

 그때, 향기가 느껴졌다. '시트러스 향'이라고 부르던 냄새였는데, 무척이나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 향기가 그 상황 속에서는 내게 죄책감을 덮어주는 것처럼 와 닿았다.


 냄새를 잘 맡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둔한 쪽에 가까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이 상당히 신기했다.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기억이 생기고 나니까, 감각하는 생활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 맡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런 생각이 들다니.

(혼자서 이런저런 글을 찾아보다가 내가 생각했던 것들과 소름 끼치게 들어맞는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기사 '왜 대부분의 언어에는 냄새를 묘사하는 단어가 거의 없을까요?'

-> http://newspeppermint.com/2015/11/09/m-smell/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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