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
믿음에도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맹목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경험의 결과를 믿는 경우도 있고, 수치화된 근거를 믿는 경우도 있다. '믿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과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는 때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신용할 수 없는 이들이 끝을 향해 치달아 갈수록, 갈등은 흥미로워진다. 그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지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정청은 자성을 믿었고, 강 과장도 자성을 믿었다. 그 두 사람의 믿음의 출발선은 달랐다. 정청은 자성과 함께 시작해 그 위치에 도달한 그 시간의 힘을 믿었다. 둘의 시작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정청이 자성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파악하고 믿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반면에 강 과장이 자성을 믿은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처음 강 과장이 자성에게 일을 제안할 때의 상황을 보면 강 과장은 자성에게 많은 걸 묻지 않는다. 이름 한 번 묻고, 화교 출신이냐 묻고, 인사 기록 카드를 구겨서 버리고 나서 딱 맞는 일이 있다면서 일 하나 같이 하자 말한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서, 나중에 다시 따로 보면서 이 생각이 들었다. 강 과장은 정말로 자성을 믿었던 것일까? 인사 기록 카드를 구겨서 버리는 것으로 그 모든 신뢰의 과정을 표현한 것일까? 처음 볼 때에는 이런 생각이 없었다. 다시 보면서, 강 과장이라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이 일에 뛰어들어서, 어떤 형태의 인간관계를 맺어가며 일했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실제로 믿었던 것인지, 믿는 척 연기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개성이 강해야만,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자성'이라는 캐릭터가 그랬다. 하나하나 면면이 강렬하고 적극적인 캐릭터들 속에서 자성은 수동적이었다. 시종일관 식은땀을 흘리는 듯해 보였고, 말을 많이 했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촘촘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자리만 텅 비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런 백지 같은 면모는 그를 둘러싼 상황의 갈등들을 묘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화 내내 수동적이었던 그가 일순간 바뀌는 장면에서는 묘한 쾌감마저 있었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선택다운 선택을 한 것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보면,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 속에 이자성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장 속에서 '직급'으로 호명받는 나의 정체와, 그것이 아닌 '나'의 정체가 언제나 같을 수만은 없다.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그때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자성은 누군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배신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감정적으로 그와 함께 해왔던 사람도 있었고, 본인의 정체를 알던 사람도 있었다. 겉으로는 양쪽 모두 신뢰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작 그 누구도 믿지 못했던 사람이 이자성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믿고,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물론, 영화 '무간도'의 경찰이었던 진영인도 선택을 하지만, 그의 선택보다 이자성이라는 인물의 처지나 심정이 더 와 닿았다. 내가 본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사람이었다.
불신이 믿음을 측정하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의심은 신뢰를 재고해보게 만들고,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끔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과 배신의 위험성은 수치화된 데이터로 신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게 만들었다. 배신과 계략이 점철된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이 영화가 유독 재밌었던 이유는 그 '믿지 못하는 마음'을 잘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불신의 감정들과 이런 감정이 엮여있는 상황이 종합적으로 잘 엮이면서 몰입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는데, 사람들은 항상 믿는다 믿는다 말은 하지만, 오히려 믿음보다는 불신을 더 많이 신뢰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