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저'
1.
익숙하다 생각했던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이런 면도 있었어?'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또다시 '알고 있다'는 말을 쉽게 썼다는 자책이 들었다. 가끔 소원해지는 관계에 대고 '아 그냥 이야기하지'하는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그 생각의 끝은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냐는 물음에 닿는다. 어떠한 종류의 가식도 없이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찌 되었건 관계에서 감정은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니까. 그러니 한쪽에서 감정을 쥐고 흔드는 것을 정상적인 관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슬픈 것은 당장에 나의 감정과는 별개로 관계가 끝날수 있다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 감정이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생각처럼 아픈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첫 만남에 이별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 만남이 운명적인 만남이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극적인 만남은 평범한 관계가 아닌 것처럼 이별은 평범한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2.
앨리스와 댄의 만남은 그랬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바라보며 걸어가고, 걸어가던 중에 사고가 나고, 부축해주면서 나눴던 한 마디. 예상하지 못했던 그 한 마디는 평범한 만남을 '운명'이라는 말로 포장 가능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특이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인사는 낯선 두 사람의 관계를 녹이는 그 뭔가가 있었다. 거기에 데미언 라이스의 목소리는 간절하게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얹어진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은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식은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은 밋밋했고 축축했다. 영화에 연인들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는 없다. 만남과 이별의 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인 간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었다. 만나고 좋아하게 되는 과정에서 잊었던 거리감은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3.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변함없이 웃고 있고, 변함없이 울고 있다. 묶인 시간 속에서 관계는 좁혀지지도 벌어지지도 않는다. 오직 멀어지는 것은 내 감정, 내 마음일 뿐이다. 관계라는 게 참 그렇다. 남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에 돌아보면 남남일 뿐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만나면서 세웠던 수많은 규칙들과 약속들은 어쩌면 그 낯선 관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참 재밌는 소재였다. 사진은 피사체의 사연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아름답게 포장되어 나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들의 만남 또한 그랬다. 내가 만약에 영화관 밖에서 이 커플들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면 이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진을 보는 것처럼 단편적인 정보들로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커플 이야기가 뭐가 재밌냐'라고 말하면서.
4.
의도적으로 감독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세세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이고 그 시간을 어떤 형태로 보내온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실컷 상처 내고, 그 상처를 핥고,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죽 늘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진흙탕 싸움뿐이던 이 이야기의 끝은 그렇다. 돌고 돌아 다시,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그 사람. 내가 진짜 좋아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좋아했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데미언 라이스의 애절한 목소리는 처음엔 'I can't take my eyes off you'로 들리다가 종국에는 'I can take my eyes off you'라 부르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직 하나뿐인 만남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낯선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으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클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