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틀로얄'
배틀로얄이라는 영화가 나온 지 16년이 지났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다른 공포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이 영화를 충격적으로 느꼈던 이유는 그 콘셉트의 잔혹성에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에는 '친구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라는 환경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쓸모 있는 어른이 되자!' 라던가 학생들에게 무시받았던 교사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충격이 잦아들고 내용을 곱씹어볼 여유가 생기자 학생들이 친구를 죽이는 내용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더 흥미가 생겼다.
'실업률 15%, 실업자 천만 명, 등교 거부생 80만 명, 급증하는 소년범죄'
자신감을 잃은 어른들은 마침내 하나의 법안을 가결했다. '신세기 교육혁명법(BR법)'
'자신감을 잃은 어른들'이라는 문구가 일단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신감을 잃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법안이라는 표현은 자신감을 잃게 만든 대상이 누구냐는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민은 필연적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어른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왜 어른들은 학생들이 서로를 죽이게끔 설정해둔 것일까. 이런 환경을 용납하는 사회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배틀로얄을 통해 촉발된, 학생이라는 계급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은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다. 일본의 스릴러와 호러 영화에서 학생들은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한국에서 학생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을 보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훨씬 더 잔혹했고, 더 세밀하게 묘사했던 것 같다. 학생들은 영화 속에서 그들끼리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하거나 일방적인 학살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단지 죽거나 다치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식 또한 지극히 잔혹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일본의 기성사회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로 쌓아뒀던 학생들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이런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배틀로얄' 1편은 2000년도에 나왔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스릴러 영화나 공포영화들은 2014년도에도 스크린에 오르내렸다. 여전히 어른과 학생으로 나뉜 갈등은 좁혀지지 않았고, 집단 따돌림은 보다 은밀한 형태로 변했다. 어른들은 이 '악독한' 아이들을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처럼 대했다. 한데, 문제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전조가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일 또한, 단지 아이들이 전에 없던 행동을 시작하거나 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과정 중에 해소되지 않은 갈등들이 이런 형태로 폭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문제는 어느 한쪽의 것으로만 시작되는 게 아니다. 단지 학생과 교사의 갈등 자체만 두고 문제를 파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결국에 개개인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습관들, 문화적 습성에 밑바탕을 두고 발생한다. 2학년 담임으로 등장했던 기타노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배척받는다. 재밌게도 배틀로얄이라는 영화 속에서 학생의 대척점에 서서 교사의 입장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 담임이었던 기타노 밖에 없었다. 학생들을 내보낼 수 없다고 말렸던 3학년 담임은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누굴 싫어하려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지'
책임이라는 것에서 마냥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생들에게도 동일하다. 그들에게 책임은 유예될 뿐이지 언젠가는 그것을 감당하게 된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도 책임을 지는 것이고 싫어하는 일을 할 때에도 책임을 진다. 한편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비교육적인 영화였지만 다르게 본다면 그 어느 것보다도 교육적인 영화였던 것 같다. 다소 처절한 방식이었지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배틀로얄', '악의 교전',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