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4
여행은 준비에서 시작한다.
그냥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목적의식이 생긴 순간 여행은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책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지프의 신화'라는 책이다. 왠지 이 책이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p.11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인생의 가치에 대해 고민을 해볼 여지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부터 자살 이야기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일이 역설적으로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에는 틀림없다. 내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은 나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17.2.6
여행 시작.
얼떨떨한 기분이 이어진다. 책이 180쪽가량 되다 보니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p.12 살아가는 이유라고 불리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훌륭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예전에 글에 썼던 내용의 이야기가 이 책에 나와서 상당히 놀랐다. 그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두고서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임과 동시에 죽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라피트 열차, 잠수함처럼 생겼다라피트라고 하는 열차는 '열차'가 가진 환상과 로망을 적극 반영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빠르다'는 것을 강조한 열차라고 보기에는 낭만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지문 하나 묻어있지 않은 창문과 내부 상태를 확인하면서 느꼈던 만족감은 어쩌면 이 나라가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프라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꽤 많은 부분을 읽었다.
p.45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어처구니없는 침묵 사이의 대비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하나의 삶의 모든 결론이 여기에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에 매달려야만 한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1,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절망과 무력감에서 '부조리'를 고민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역으로 현재 시대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서 지금 이 순간들을 되돌아본다면, 나는 무슨 단어로 이 상황들을 정의할 수 있을까.
오늘의 교훈: 음식을 코스로 시킬 때에는 주의하자
사소한 소통의 오류였다. 그래서 먹게 된 음식은 단품이 아닌, 코스 요리 5인분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수월한 식사 주문으로 시작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이렇게 황당한 사건으로 시작할 줄은 몰랐다.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뭐, 실수야 어느 때나 벌어지는 일이니까. 중요한 것은, 책에 등장하는 대로 '결점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닐까.
17.2.7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거리p.80 산다는 것, 그것은 부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faire vivre I'absurde). 부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유리디스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돌아설 때만 죽는 것이다. 이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의 하나는 반항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린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린다. 내가 사라져도 사람들의 기억은 남지만,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전부 사라지게 된다면 '나의 존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존재했으나, 존재한 적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죽기 전까지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에 생명체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커다란 방 안에 갇혀있는 존재라 생각한다면, 살아가는 이 순간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역사는 그 한정적인 수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부여하는 과정 속에서 지금에 이르렀다. 부조리에 갇혀 있지만, 끊임없이 발버둥 치면서 인간은 불을 만들어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그러나, 살기 위한 발버둥, '반항'.
여유를 만끽하는 여행 도중에, 삶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얻은 것 같다. 여유가 없었다면 이 책을 읽었어도, 이 이야기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 같다. 나의 일상에서 비죽 튀어나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할 수 있는 고민들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만족스러운 도서 선정이었다.
오늘은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놀러 갔다.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비싸게 느껴지는 기념품의 가격대를 체감하면서도 기어코 그 물건들 중에 하나를 집어 드는 심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곳은 기어코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공간이다.
아무래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해리포터' 마을이었다. 단지 책에서 읽었던 공간을 보게 되었다는 스릴보다는, 세세한 부분에서 이곳을 체험하는 관객들을 배려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난데없이 툭 튀어나와있는 스피커 때문에 흥을 깨는 상황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소품은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서 제작된 티가 났다. 그래서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이 모든 상황들을 경험하고 나니까, 터무니없는 기념품 가격 또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다양하게 반짝이는 불빛들과 웅장한 음악 속에서 사람들은 꿈의 영역에 살짝 도달한 기분이 든다. 영수증은 현실적이지만, 이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충분히 그 당시의 기분을 만끽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17.2.8
가이유칸 심해층으로 들어가며오늘은 가이유칸 수족관에 갔다.
p.88 부조리한 인간은 불타면서 얼어붙어 있고, 투명하면서 한정되어 있는 우주,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이 주어지고, 그것들을 넘어서 붕괴와 허무뿐인 우주를 엿보는 것이다.
p.94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의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이라는 세 개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오로지 의식의 활동에 의해서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규칙으로 변형시킨다.
부조리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길을 잃어버린다던가 말을 몰라서 바가지를 썼던 모든 기억들이 이 공간에 있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라 생각하니 이 또한 일종의 부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수족관을 지은 사람들이 심해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 실제로 심해를 체험하는 듯이 내려가는 형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물론, 실제로 저 심해 생물들이 살던 깊이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해까지 내려간다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이외에도 미묘한 온도조절을 통해서 실제 그 지역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물고기들은 그에 반해 으레 그렇듯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귀찮았던 것 같다. 가끔 바닥에 붙어서 죽어있는 듯이 사람들을 낚아버리던 것들도 있었다.
수족관을 구경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한다면, 밑도 끝도 없이 괴상한 상상으로 빠져버린다. 외계인의 입장에서 지구가 수족관 사이즈만 하다면 우리 또한 저 물고기들과 다를 것 없는 신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나 수족관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에 보면 생태계의 정점에 놓인 생명체들이 과시할 수 있는 지적 유희의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나 하게 된다. 이 생각 아니면, '저 물고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횟집에서 봤었어' 하는 생각이나 하게 된다. 한참을 그런 생각에 빠져서 돌다 보니까 40분도 걸리지 않아서 다 구경하고 나온 것 같다. 그래도, 그곳의 기념품 매장은 좋았다. 덕분에 귀여운 수달 인형도 구할 수 있었다. 인형을 보고서는 냉소적인 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다. 마음에 드는 가격대와 마음에 드는 기념품이었다.
17.2.9
오사카 주택박물관(밤)오늘은 오사카성, 역사박물관, 주택박물관을 돌아다녔다.
p.124 "나는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 자를 경계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게을러서 껍데기에 머물러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인생의 끝에 이르러, 인간은 단 하나의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해를 보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만약 단 하나의 진리가 분명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생의 좌표로 삼기에 족한 것이다.
나로 말하면 개인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필요하다면 적당한 경멸로써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에 의해서보다는 침묵하는 것에 의해서 더 인간답다.
비 오는 날의 오사카는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러운 느낌이 있다. 흐릿하긴 했지만, 그래도 해가 떠있는 환경에서 마주하는 여행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유독 일본 사람들은 비닐우산을 많이 들고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물고 있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제공하던 우산도 비닐우산이었지만,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여행객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비닐우산을 들고 다녔다. 나중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소재로 촬영을 한다면 이 이야기를 설문 조사해봐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각기 다른 빌딩들로 공간을 메웠다. 고저의 차이뿐만 아니라 색감의 차이 또한 명확했다. 이 사람들에게 도시는 어느 한 건물조차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건물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있었다. 아마도 독창적인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환경 조성은 이런 건물 설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성은 겉에서 볼 때보다 안에서 볼 게 별로 없었고, 역사박물관도 그와 비슷했다.
아는 것이 '100'이라고 했을 때, 만약에 한 '30'정도를 알고 있었다면 굉장히 재밌게 즐겼을 법한데 아는 내용이 0에 수렴하다 보니 오히려 흥미가 떨어져서 빨리빨리 걸어 나오게 되었다. 두 장소는 공통적으로 기념품 매장이 제일 재밌었다.
주택박물관이 오히려 위의 두 장소들 보다 더 재밌었다. 내부 스튜디오에서 낮밤이 변하게끔 되어있는 설정들이나 일본 전통 옷을 대여해서 입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깨알같이 재밌었다.
17.2.10
기나 긴 탑승 수속 가운데 달이 떴다어느새 집에 돌아가는 날이 되어버렸다.
p.178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내버려둔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뛰어난 성실성을 가르쳐준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그 후부터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불모의 것도 하찮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산의 금속적인 빛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라피트 교환권을 잃어버렸다.
비일상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삶.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글은 단단한 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게 쓴 것은 아니었지만, 쓰고 있는 순간순간과 글감을 건져 올리는 모든 시간이 생생했다. 카뮈의 힘인지 매력적인 이 공간의 능력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카뮈는 인생의 주제를 부조리와 저항으로 잡았다. 그것을 고민하고 철학적 사유를 나누면서 사색하고 책을 써냈다. 생을 걸고 고민해볼 주제를 잡는 일은 무척이나 쓸쓸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쉽지만은 않았다. 100 페이지가 넘어갈즘에는 좀 더 쉬운 책을 고르는 거였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래도 책과 함께하는 여행이 나쁘지는 않았다. 좀 더 기억에 남는 '일'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