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감나무

낯선

책 '타자의 추방'

by wanderer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유, '타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묻는 책이었다. 저자는 '같은 것의 테러'라는 이야기와 함께 '다름'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경계를 풀어낸다. 왜 '같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현시대가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지 짚어낸다.


p.15 오늘날 네트는 모든 다름, 모든 낯섦이 제거된 특별한 공명 공간으로, 메아리의 방으로 변하고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파괴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흥미로웠다.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일은 오히려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타인과 구분할 수 없는 내가 되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그렇게 '겹쳐진' 사이 속에서 애써 거리를 재보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특히나 이 사회가 기본적인 것이 0과 1로 만들어진 '디지털 투명사회'이다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p.18 같은 것의 지옥에서는 타자를 욕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문구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같은 옷, 같은 머리, 같은 행동, 같은 목표를 가진 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12번이기도 했고, 11번이기도 했고, 13번이기도 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고등학생'으로 겹쳐진 존재였다. 그 안에서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시험 이후의 삶에 대한 행복을 이야기하셨다.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라는 이야기들까지 학생들의 행복은 유예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과 수능 이후의 삶을 갈망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달라질 수 있는 권리'였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의아한 부분이다. 졸업 이후의 자유를 위해서 '고등교육을 받을' 자유를 반납하고, 학교를 거쳐서 사회로 내몰린 학생들은 등급별로 나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나는 '같은 것의 지옥'에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p.25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두렵기 때문에 대상을 증오하게 되고, 증오하다 보니 그 대상에 대한 미지와 불안감이 두려움을 잠식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100% 열린 마음을 가지고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당연한 말이지만,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경계'하는 행동은 본능이다. 모두가 모두를 경계하며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스템을 만들었다. '개인'들은 그렇게 집단을 통해 보호받았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 이후에, 저자는 이방인의 권리인 '환대'의 개념을 소개한다.


p.32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환대가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고, 친절함을 통해서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 '접대의 관습'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한 문화권에서만 사용되던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습이다. 물론, 그 모양새는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지만 저마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대접을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옛날의 '여행'은 현재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들이 이해를 했던 것 같다. 치안도 좋지 않고,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길이 뻔히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길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주인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줬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 믿었던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아도 서로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신뢰의 시스템이 어떤 문화권이든 공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보다 더 불안하고, 두려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 '신뢰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p.51 사유는 "심연"을 "사랑한다." 사유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향한 명료한 용기"가 내재한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같은 것이 계속된다. 사유는 "심연의 끔찍함 속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무음의 목소리"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사유는 심연을 사랑한다. 자잘하게 부유하는 생각들은 홀로 남아 내적으로 파고드는 순간 속에서 '사유'로 숙성한다. 지식은 부가적인 재료에 불과하다. 생각이 깊어가는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홀로 몰두할 시간뿐이다. '심연'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심연은 두려움의 공간이다. 간섭 없는 자유의 공간이다.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에도, 내가 제대로 '홀로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은 그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내던지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또한 비슷하다. 나만의 색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를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밀어 넣어 보고, 평범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일이다.


p.101 오늘날의 소통은 너라고 말하는 것, 타자를 호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로서의 타자를 호출하는 것은 "근원적인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디지털 소통은 모든 거리를 파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타인을 최대한 가까이 내게로 끌어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소멸시킨다.


언뜻 생각하면, '소통'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말이 잘 들리는 위치까지는, 수화기에 목소리가 들리는 시점까지는 다가갈 수 있다. 다만, 소통의 목적은 서로가 서로의 의견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끝나야 한다.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머릿속까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각자의 의견이 있다는 사실에서 끝이 날 때 소통은 비로소 두 사람을 만들어낸다. 소통의 목적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책에 나와 있는 대로 타자를 '호출'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마음껏 제 취향을 내보일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좋아요'의 방식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결국, 그 외의 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취향이라는 벽으로 사람을 가두고, 내가 원하는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 점점 더 같아진다.

'소통'의 사전적인 의미는 뜻이 통해서 오해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의견의 다름이나, 찬성과 거절이 없다.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수준에 있다는 사실만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소통'에 대한 우리의 규칙이라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소통'은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해와 왜곡의 현장으로 전락한 디지털 소통의 현장이 '소통'이라는 이름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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