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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Jan 22. 2018

살아가는 일

드라마 '퍼니셔'

경야(經夜)


 프랭크 캐슬은 가족의 죽음에 시달린다.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 그를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몇 번이고 뒤통수에 총알을 맞는 아내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지독한 삶이다. 가장 끔찍한 장면이 반복해서 되풀이되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삶과 죽음, 그 어디쯤의 경계에서 구간반복에 걸린 임사체험이 이어진다. 프랭크 캐슬은 수없이 죽고 되살아난다.


 본인의 능력으로 모든 상황을 대응해왔던 그로써는 맨 정신으로 버텨낼 수 없었다. 왜 무력하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을까. 왜 무력하게 가족을 떠나보낸 가장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 가족은 죽어야만 했는가. 왜. 왜. 왜. 몇 번이고 되뇌어도, 명확한 답은 없었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대신에 그는 분노에 취했다. 온전히 그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서는 편히 쉴 수 없었다.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본인을 괴롭히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그는 죽는 길을 선택한다. 다시 한번 피와 땀의 거리로 향한다. 그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죽어가는 중이다. 어쩌면, 프랭크 캐슬은 죽은 채로 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닐까? 죽은 채로 밤을 지새우는 중에 있는 게 아닐까?


 드라마의 맥락이나 분위기가 온전히 그 느낌을 주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아있는 자의 밤은 죽은 자의 기억들로 채워진다. 그 기억들을 놓아주지 않기에, 캐슬은 분노하며 적을 찾아 총을 쏘다가도 이따금 허무해진다. 눈앞의 적을 해치우면 다시금 목적을 잃고 표류한다. 그런다고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나지 않기에, 그는 한바탕 화를 내다가도 쓸쓸해지고 슬퍼진다. 원하던 것들을 손에 넣었지만, 앞으로 그에게 남겨진 삶은 쉽지 않다. 프랭크 캐슬은 이제 싸우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복수라는 성질에 대한 감상이 길어졌다. 정의는 때에 따라 고귀하게 비치나, 복수는 언제나 처절하다. 처절하고, 아프다. 피해자는 길고 긴 복수 끝에 가해자에게 냉혹한 복수의 형별을 내리나, 그 또한 고통받는다. 가족의 죽음, 트라우마, 후유증, 어떤 것이든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살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만 한다. 크나 큰 슬픔을 감당하는 일 또한 무거운 일이고, 그것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도 너무나 무거운 일이다. 번민의 굴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답을 찾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켜보는 일도 마냥 수월하진 않다. 복수는 모든 것을 잡아먹을 테니까. 복수의 감정을 내려놓은 복수자는 더 이상 그에 고통받지 않는다. 감정이 휘발되면, 그 자리에는 개인만이 남는다. 그제야 단독자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퍼니셔는 결함이 있는 캐릭터다. 심판자의 처벌이 정당해지려면, 그는 도덕적 결함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적어도 심리적으로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려면 말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면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프랭크 캐슬은 온전히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다. 비밀 작전 수행에서 있었던 과거의 문제들이 걸린다. 그런 이유로 극에서 프랭크 캐슬은 온전히 정의를 부르짖지도, 본인이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개인의 복수만을 다할 뿐이다. 퍼니셔는 그런 이유로 배트맨과는 다르다. 그는 본인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


 닐 게이먼의 작품 '망토두른 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를 보면, 배트맨의 지인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배트맨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친구, 연인, 그리고 그의 숙적들. 개개의 사람들이 풀어내는 배트맨은 그들의 말속에서 부서지고 재조립된다. '임사체험'이라는 그럴듯한 단어가 주는 기묘한 위치 속에서 삶과 죽음의 굴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영혼은 자유로이 그 시선들을 수집하고 마침내 제 자리로 돌아간다. 오래된 역사를 환기하는 과정에서 닐 게이먼은 배트맨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프랭크 캐슬'을 다루겠다는 야심으로 뛰어든 이 드라마의 제작진들 또한 그랬다. 죽음과 부활의 경계에서 낡은 이름을 지우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출발하기에 죽음보다 좋은 출발은 없다. 전설은 과거와 함께 죽으나, 역사는 살아있는 자들의 손에서 기록된다.


 이 드라마 또한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프랭크 캐슬이 밤마다 죽은 아내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면 그의 지인들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유령처럼 사라져 버린 특수부대원, 헌신적인 가장,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프랭크 캐슬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은 오직 그들의 이야기일 뿐, 프랭크 캐슬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진 본인을 감당해야만 했다. 자신이 빌미가 되어 가족이 죽었으니, 자신의 조각을 뒤적거리는 순간들은 온전한 고통이었다. 하나의 시선으로 모아진 프랭크 캐슬은 마침내 사람들에게 선언한다. 그가 다시금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돌아왔음을.


 복수와 폭력의 무게는 무엇으로 매달아야 하는가. 누군가에겐 '삶'이 고통이고, 누군가에겐 '죽음'이 벌이다. 프랭크 캐슬의 행동들은 그런 점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의 절규를 들으며 너무 많은 것을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복수와 폭력의 결과에 함몰되어 오직 그 분노의 에너지만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에게 이 드라마는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온전히 각자의 해답에 달려있다.


사진 출처: IMDB 'The Punisher(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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