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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Feb 05. 2018

미래'들'

드라마 '블랙 미러'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지극히 어둡고 비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율과 편리로 대변되는 미래의 긍정성은 그것으로 희생되는 인간들의 모습에 잠식되어 버린 지 오래다. 로봇들의 세상, 기술에 적응한 사람들. 마약 중독처럼, '기술 중독'에 빠진 사람들, 그들은 그것을 끊지 못하고 산다. 그 자체는 끔찍한 일이 아니다. 편리해진 상황들에 적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던가.

 진정으로 끔찍한 일은, 그런 상황 외의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왜 당연하게 그런 모습이 그려지고, 그 외의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운가. 무한정 뻗어나가던 상상력이, '미래'라는 시제 앞에서는 한없이 수그러든다.


 이 드라마의 영향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드라마를 처음 접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기계와의 전쟁이나, 로봇이 장악할 미래를 그리는 것에 능숙했다. 그런 모습만 보고 자라다 보니,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까? 묘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래도 좋아하는 영화 중에 '바이센테니얼 맨'이 있었는데 말이다. 다 커서 보게 되는 영화와 드라마 그 어디서도 인간은 인간스럽지 못하다. 인간스러운 로봇을 그려보고, 로봇 같은 인간을 묘사하는 일이 더 쉽기 때문일까?


 찰리 브루커가 그려낸 기술 변화의 디스토피아는 매력적이. '편의 증진'을 목표로 두고 끊임없이 진화해온 사회의 단면은 불안과 재미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편리함 속에서 재미를 느끼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에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주체는 없고 타인의 기준과 타인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검은색 대기 화면으로 사용자를 비추는 거울, 낭만적이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표현이다. 검은 화면의 거울은 현대인의 삶을 비춘다. 여과 없이 비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꾸밀 수 없다.


 스치듯이 지나갔던, 부정적인 미래상에 대한 틀은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부정적인 모습들이 더 오래 기억되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극의 잔상은 머릿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인이 박힌 장면들을 보며 슬펐다가 무서워졌다. 어떡하나, 현시대의 미래가 이런 모습이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상상하고 꿈꿔야 하는가. 불안은 자연스레 고민으로 피어오른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맥락이 잡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니, 어렵기만 하다.


 개별의 에피소드들은 저마다 독특한 소재들을 들고 등장한다. 한 번쯤은 경험해봤거나, 들어봤을 소재의 애플리케이션들 혹은 시스템들 혹은 아이디어들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시즌 4에서는 '소개팅 어플'콘셉트를 주요 소재로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아동 감시 어플'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4번의 시즌을 거치면서 세계는 점점 더 단단해졌고, 그만큼 복잡해졌다. 새로운 소재를 들고 오지는 않았지만, 더 견고해졌다.


 기억과 시선.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돌아본 SNS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저 두 가지였다. 기억을 저장하거나 기억을 없애는 방식, 어떻게 사물을 바라볼 것이냐 하는 시선의 문제. 기억과 시선의 조합에서 파생되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보다 깊게 머릿속에 잔존한다. 미래 기술로 선보이는 아이템들은 시각을 장악한 채로 촉각의 체험과 청각의 공포도 일깨운다. 밀실의 벽면 한편을 모두 채우는 디스플레이 화면이나, 터치 스크린의 활용 방식으로 미래 기억을 현재 시청자들에게 강제로 '이식'한다. 묘하게 거북한 환경들 속에서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요소는 소리의 압박이다. 매 에피소드가 그렇지는 않지만, 거북한 환경을 미리 제시하고 마지막에 짜증과 불안을 소리로 한 번에 터뜨리는 형식은 이 시리즈를 '반드시 기억하게끔' 만든다. 소리가 끊기는 지점에서 한 번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이 사건들을 어느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그럼요. 미래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선명한걸요!

 드라마의 구성 자체가 기술 발전에 따른 부작용이 '반전'처럼 소개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4개의 시즌을 거치는 동안에 시청자는 드라마의 그 패턴이 익숙해진다. 4개의 시즌으로 이뤄져 있고, 하나의 시즌에 많은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구조 자체가 비슷한 탓에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미래의 모습이 그런 형태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트렌드, 큰 강의 줄기.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정한 미래가 아닌, 미래의 '종류'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들은 생각의 연쇄작용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람으로, 군중의 얼굴로 만들어지는 '미래 사회'의 모자이크로 이어진다.


 퍼블리에서 읽었던 글 중에서 미래와 관련된 인상적인 글이 한편 있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표현은, 미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future'라고 부르지 않고 복수형 접미사 's'를 붙여 부른다는 말이었다. '미래는 예측하는 순간, 그 예측이 다시 미래를 굴절시킨다.'는 말로 미래 예측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배제하게끔, 논의 구조를 만드는 형태로 이야기를 연다.

 그 말, '미래 예측 자체가 미래를 다시금 굴절시킨다'는 말처럼 블랙 미러가 보여줬던 기술 발전의 부정적인 미래상은 다양한 형태의 선택지를 만들어낸다. 부정적인 단면만을 보여준다 해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미래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은 예상할 수 있기에 그것을 피하는 형태로 세상은 변해간다. 불안을 안도로 바꾸는 일은 아무리 우리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까. 불안도 당연하고, 공포도 당연하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고민스러운 미래를 풀어낼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질문들을 다시 곱씹어 보면서 어떻게든 최선의 '현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가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IMDB 'Black Mirror(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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