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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Dec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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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시, 나의 도시'


 열띤 얼굴로 공부를 하는 소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이 도시에 왔다.

 소녀가 사는 곳은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공간, 재개발의 명목은 주민들의 편의증진이었다.

 소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게 진행되는 재개발이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녀의 가족이 돌아갈 곳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걸.


 프랜신의 가족들은 개발 때문에 이사해야 하는 환경에 처한다.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동네가 개발되는 동안에는 타지에서 살아야만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임대주택은 콘도로 바뀌게 될 예정이다. 지금 있는 집의 월세도 내기 힘든 마당에, 바뀐 집의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프랜신은 수업시간에 음악 만드는 것을 배웠다. 본인의 시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쉽진 않다. 다른 사람과의 공유는 큰 산이다. 그녀에게 예술은 현실이고, 현실은 시가 된다. 예술과 맞닿은 소녀는 본인만의 시를 쓴다. 천천히, 그녀만의 시를 쓴다. 음악에 있어서 두려워하고 있는 프랜신에게, 선생님은 꼭 도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아닌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쉽지만은 않다. 프랜신은 걱정스럽게 선생님을 쳐다본다. 프랜신이 글을 직접 소리 내어 읽는 과정이 좋았다. 아무런 음악 소리 없이도, 프랜신의 목소리가 삶과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소리는 온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음악이 아니어도, 중간중간 화면에 새겨지는 듯한 프랜신의 내레이션은 지극히 시적이다.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살아왔던 곳을 떠나야만 하는 과정이 쉬울 리가 없다. 프랜신뿐만 아니라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다. 담당 공무원들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보지만, 마음속에 깊숙하게 박혀있는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못한다.


 누구든 궁극적으로는 이별을 겪게 된다지만, 프랜신과 마을 사람들에게 닥친 이별은 예상보다 빨랐다. 아빠와 함께 지내지만, 여전히 엄마가 보고 싶은 프랜신은 그런 복잡한 감정들을 온전히 담아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낸다. 한 순간에 폭발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프랜신의 눈을 따라 흘러가는 다큐멘터리는 천천히 속에서 끓어 넘친다. 피할 수 없는 계획을 일컬어 사람들은 운명이라 부른다. 운명을 두고, 생각하고 싸우며 사람들은 본인들의 길을 만들어왔다. 빌라 웨이즈 사람들이 처한 계획 또한 운명일까. 결정나버린 사안에 이견이 생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꿈을 꾼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음악을 만드는 일이 처음이다 보니, 당혹스럽고 부끄럽기만 하지만 프랜신은 천천히 목소리를 높인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울기엔 아깝다’고.

 카메라의 시선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마을을 보고 주변 사람들을 보고 세상을 쳐다본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은 나였을 뿐인 것을 몰랐다.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온전히 바라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뉴스에서 슬프고 슬픈 기사들밖에 보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보더라도 몇 겹씩 쌓인 틀을 거치지 않고서는 순수하게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졌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쳐다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마다의 가사를 읊는 내레이션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랩처럼 들리기도 하고 연설처럼 들리기도 하는, 하나의 선언처럼 들리기도 하는 개개의 내레이션은 하나하나 묵직하게 심장을 얽매고 있었다. 이 구절들이나, 노래 가락이 당신 삶의 구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예술을 나눴다. 예술은 표현이다. 빌라웨이즈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시를 썼던 이유는 온전히 본인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술은 사람이 꿈을 꾸게 만든다. 사회 속에서의 본인,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개인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고 상상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표현이었던 것이, 범위를 넓혀 사회와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포기하지 않는 몽상가가 승리한다고 한다. 꿈꾸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 찰스 오피서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감독은 폭력과 범죄로 얼룩진 틀로 빈민가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뉴스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어쩌면 이 영상이 빌라웨이즈 동네를 찍은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모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지금이면 동네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 이곳에 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것은 총이 아닌 펜이다. 적어도 펜에 잉크가 차 있는 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시, 그렇게 지어낸 그들의 도시라는 것은 잊히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도시재생사업으로 변하게 된다. 몇십 년 동안 살아왔던 동네는 아닌지라, 이곳의 변화가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아쉬움보다는, 바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이 더욱 크다. 이질감을 느꼈다. 몇십 년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정을 붙일 만큼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이 공간이 '집'이나 '고향'으로 느껴지지 않는 반증일까? 왠지 즐거운 감정이 드는 것이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 괴로움으로 남을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올해에는 유독 그런 키워드들과 인연을 맺었다. 공동체나, 지역, 도시재생이나 혹은 청년.


 먹고사는 일을 고민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하게 되었다. 근데 정작 내가 뱉어낸 말들이 내 삶에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가 자라서, 타지에 있는 대학을 오게 되면 스무 살 언저리부터 그곳은 제2의 고향이 된다. 표현이 어려워 고향이라는 말을 썼지만, 정작 그곳에 고향의 감정은 없다. 떠돌이와 이방인의 생활패턴을 답습하며 사는 곳의 술집이나 맛집 몇 군데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 고향 친구는 없다. 1학년 때는 새로운 친구들이 또 다른 20년의 친구들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끔 완전히 연락이 끊긴 '친구 목록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 못내 아쉽다. 정말 연락하고 싶을 때 가끔 했다가 읽고 씹힌다면 또 민망하다. 아마 내가 역에 조금 오래 앉아있다 보니 착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스무 살을 넘기고 '동네 친구'를 만든다는 사실은 약간의 오바를 섞어서 버킷리스트 목록에 들 수 있을 정도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듯하다. 적어도 본인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2년을, 혹은 4년을 혹은 그 이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졸업을 하던 친구들, 선배들의 얼굴에서 약간의 슬픔을 느꼈던 것은 그런 헛헛한 감정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고향의 감정을 느끼고 싶으면, 그곳에 '그때 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교수님은.... 잘 모르겠다. 해당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이고 싶은 것은 로망일까? 11학번이면 이제는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 느낌이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이곳에 다시 놀러 왔을 때 나를 보면 반갑지 않을까? '저 선배 아직도 저러고 있어(좋은 의미로)'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조금이나마 이곳이 고향의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내게, 지금 이 공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의 글이 나의 도시가 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나의 시, 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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