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이 책은 시간과 서사보다는 상징과 기호로 꽉 짜인 구성을 쓰고 있다. 보통의 만화라면 있을 간단한 인물 소개도 없이 오로지 환상적인 이미지와 광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환자인 조커, 투페이스, 등의 인물들은 이 정신병원을 장악하고 직원들을 인질로 잡는다. 그러면서 인질을 풀어주는 대신에 배트맨을 넘기라는 딜을 받는다. 배트맨은 이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공포의 화신인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악당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뿐이다. 그는 조커가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까 두렵다. 배트맨은 자신의 합리성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자신은 합리적인 선택을 해온 것인가? 하고서. 그는 아캄 정신병원에 들어설 때마다 집에 돌아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인물 묘사는 추상적이고, 분위기는 음울해서 어떤 내용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배트맨은 그가 집어넣었던 악당들이 있는 아캄 정신병원에서 인질을 구해내고 그곳을 탈출해야 한다. 그가 이곳을 헤쳐나갈 때 필요한 것은 그의 유틸리티 벨트도, 배터랭도, 강인한 육체도 아니다. 오로지 그의 의지를 가지고 헤쳐나가야 한다. 조커는 모든 역경을 헤치고 정신병원을 나오는 배트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조커 : 작별은 늘 시원섭섭하지, 자기야. 그래도 우리 덕분에 오늘 재미없었다고는 말 못 할걸. 밖에서 재미있게 지내도록 해. 정신병원에서 말이야. 다만 잊지 말라고 혹시 그쪽 생활이 너무 힘들 때면, 여기에는 항상 자네 자리가 있다는 걸.
조커는 배트맨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식으로 농담을 던진 것이 아닐까? 그는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 섬뜩한 것이 그가 배트맨의 본질을 이해하고 저런 농담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커의 이런저런 농담들이 두려운 이유는 결국에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서 행동하든지 간에, 그의 농담 앞에서 그 행동들이 우스운 장난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큰 뜻을 품고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악당들과 싸우는데, 그 모든 행동을 농담처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론, 농담이 가장 큰 무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커는 배트맨의 가장 큰 적이 된다.
자경단 일을 그만둔 배트맨이 다시 일선에 뛰어드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나에게는 그들의 상황과 상관없이 굉장히 낭만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간의 정신적인 고통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시 악당들과 싸우기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생각이 아닌가. 나는 그가 본인의 행동과 상관없이, 타락을 더해가는 도시에서 다시금 일어설 용기를 찾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조커가 '항상 자네 자리가 있다는 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영웅의 마지막 모습인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