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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Nov 27. 2018

삶의 가장 고귀한 찌꺼기

영화 '시'

 맞아. 나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잊어 먹고살고 싶지 않아.

 문득, 글을 잊어 먹고사는 삶만 아니면 만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기억해내는 모습은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한참을 고민해도 원하는 말을 생각해낼 수 없는 병이라니. 차라리 아예 모르는 말이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는 데에도, 그걸 아는 데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징조가 있었을 텐데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가만있어보자. 근데 내가 여기에 왜 왔더라? 상상으로만 끄적여도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병은 이름과 이름들로 맺어가는 우리의 세계를 야금야금 지워나간다. 살아온 날로부터 가장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는 순간부터, 역순으로.


 시를 짓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미자는 계속 이야기한다. 그녀는 예쁜 것만 바라본다. 본인이 보고 싶은 것들 위주다. 나는 그녀를 큰 걱정 없이 살아오신 마나님처럼 보게 된다. 그 성격은 손짓 한번, 걸음 한 번으로 단박에 이해된다. '아픔을 모르고 살아오셨거나, 아픔이 있어도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 해소될 수 있는 정도의 고민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 그러니 시를 짓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랬던 그녀가 큰 사건에 휘말리고, 그 사건을 거치면서 조금씩 글을 적는다. 그녀는 시를 직접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시를 짓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그때의 말은 처음과 같은 의미의 이야기일까?


 막상 찾을 때에는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피어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니 눈에 담기는 모습이 없다. 살면서 보는 모든 것들에는 멈춤이 없다.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일시 정지. 자그마한 작대기 두 개. 그대로 그 풍경을 담아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은 나머지 그림들을 잊는 것이다. 어렴풋한 분위기들 속에서 골라진 한 순간의 모습이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다. 선택은 겨우 그 순간의 단서들을 붙잡는 일일 뿐이다. 단서가 항상 원하는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항상 그를 망각하고 바라본다.


 보고 싶지 않은 세계를 봐야 하는 입장에 서보는 것. 이는 입 속의 상처를 끊임없이 혀로 되짚어보는 일이다. 엷게 피맛이 밴 생채기에는 구멍이 움푹 패어있다. 시는 아름다워도 시를 짓는 법은 아름다운 것만 보는 일은 아니다. 시인은 몇 번이고 아픔을 기억하며, 통증을 썼다 지운다. 시는 지독한 통증 뒤에 피어오르는 상흔처럼 남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시를 읽으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시를 한바탕 겪어내고 나면 이상하게 아프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오히려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많다. 모든 사람들이 시는 아름다운 거라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시를 떠올리면 저릿한 통증이 먼저 떠오른다. 시는 아파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먹함이 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명쾌한 해답은 거저 얻을 수 없다. 암만 궁리해봐도 모를 일이다. 나만의 해답은 마음 한편에 두고, 기어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게 만든다. 머리로만 보다가, 눈으로만 봤다가 그게 끝내 가슴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무력감이 머리부터 가슴까지 묵직하게 짓누른다. 머리는 저만의 생각들을 냈고 눈은 행동을 읽었는데 차마 가슴만은 제 답을 꺼내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숨 쉬고, 밥 먹고, 자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내게 만드는 힘을 묻는다. 이 이야기를 완독하고 나서 느껴지는 평범한 일상의 하루는 무척이나 괴이하다. 눈치채지 못한 하루의 사건 사고는 너무도 많고, 차마 그 진실의 하루를 직시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시를 쓰나 보다. 우리의 하루가 끝나고 눈 앞에 그저 캄캄한 어둠만이 내릴 때에 시는 마음을 우려낸다. 쓰디쓰게 우려진 삶의 마지막 찌꺼기로 부유하는 시는 오히려 무엇보다 맑다. 힘겹게 털어놓은 한 마디의 속내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힘겹게 써낸 한 문장이 심장을 다독인다.


 한바탕 울어내고 나서도 채 풀리지 않아 응어리진 삶을 두고 사람들은 시를 쓴다. 더 이상 울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시대에서 분해질 정도로 꾹 눌러 담은 슬픔은 제법 찾기가 어렵다. 나는 그런 이유로 지금과 같은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은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해결을 전제로 한다면, 시가 적확한 해답은 아니라 생각한다. 저마다 들고 있는 답이 다 다르니까. 시인의 의도를 해독(讀)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독한 마음을 중화하는 해독(毒)이 아닐까. 답의 존재보다는 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바라보자. 우리의 삶은 답이 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시(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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