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무인도에 떨어졌다.
그리고 펜을 쥐었다.
사는 일은 생각보다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살아가는 환경은 바꿀 수 있어도 철학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린 결국 관성처럼 사는 대로 삶에 이끌리게 된다. 그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스물여섯부터였다. 의무와 책임으로 배웠던 것들. 더 넓은 시야로 사람을 보면서 시스템을 이해하기 시작하던 때. 그때가 스물여섯이었다. 휴일에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겠구나'하고 직감했다. 늘어지게 게으르며 살고, 하루 종일 넘어가지 않는 문단을 쳐다보며 살고, 울렁거려도 넘길 수 있는 삶을 살겠거니 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게으르게 살아도 하고 싶은 일을 놓지는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살게 되겠지 하는 요즘 젊은이 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요즘 젊은이 답지 않게 나는 독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는 항상 내게 지독하지 않다고 핀잔을 줬다. 눈에 독기를 품고 공부하라고 그랬다. 글쎄다. 독하게 마음먹는 일이 쉬운 건 아니지만 독을 내려놓는 삶이 그렇다고 해서 쉬운 것은 또 아니다. 나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많이 아는 아이였고 그런 걸 전달하고 싶었다. 굳이 지독하게 스스로를 가둘 생각이 없었다. 좋은 건 당연히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가진 걸 나눠도 왠지 그 사람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독한 사람들은 보통은 자신이 지독하게 집착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 해낸다. 나는 그런 사람을 이겨먹을 자신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가 무인도에 떨어지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김훈, <연필로 쓰기>
하나의 일에 몰두해서 시간을 쌓고, 굳게 다져진 감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원한다. 이 글처럼 가진 도구로 능력을 십분 활용해 밥벌이를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나는 눌러쥔 펜촉이 내 삶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지길 원한다. 어느 정도로 종이와 연필, 글자에 가까워지면 그런 모습으로 보일 수 있을까? 전업 작가가 아닌 입장에서는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일이다. 밥벌이로 글을 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글만 쓰는 업은 아니기에 생기는 기묘한 감정이다. 나는 전적으로 내 펜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내 삶의 도구로 글을 택해 쓰는 살아오고 있는 건데 화면에 새기고, 자르고, 줄 노트에 아이디어를 휘갈기는 일이 전부인 나에게 글은 얼마나 가까운 걸까?
강한 글도 아니고 지독한 글도 아니라서 생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무인도에라도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글. 그런 이유로 직업인의 도구로 글쓰기를 대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주먹도끼, 망치가 되지 못하는 펜은 무엇이 될까. 생존의 도구로 펜을 쓰려면 나를 써야 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닌 온전히 작가 스스로 빚어내는 글을 만드는 펜이 생존의 도구가 된다. 글을 삶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붙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소소한 글이어도 꾸준하게 써오기는 했다. 텀은 조금씩 두어도 매 분기, 혹은 매 년 내가 본 글과 쓴 글이 실물로 담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역 매거진도 만들어보고, 영상에 쓰일 글도 썼다. 잡다한 분야의 두루뭉술한 글이 쓰였다. 처음부터 작가라는 소리가 듣고 싶던 것은 아니었는데 실물로 만져볼 수 있는 물건을 한번 내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그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쓰고 있는 걸 느꼈다. 생각해보면 뱃사공은 뱃사공이 되기 위해 계속 노를 들었고, 대장장이도 망치질을 했기 때문에 대장장이가 되었다. 물렁물렁한 글이어도 닦으면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쓰려한다. 작금의 불안감은 가야 할 길을 앞둔 여행자의 긴장 정도로 생각하고 걸어야겠다. 여전히 무인도에 떨어지면 굶어 죽겠지만 그래도 펜은 쥐어야겠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터미널', '리스본행 야간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