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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y 07. 2019

적정 수준의 사랑으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적정기술은 지역사회의 인프라 수준을 고려해서 만드는 기술을 이르는 말이다. 네이버 사전에서는 '제삼 세계의 지역적 조건에 맞는 기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적정기술이라는 단어가 특정한 기준에 맞춘다는 포인트가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를 이해해야 하고, 시선의 높이를 달리 둬야 한다. 결과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처지, 상황, 맥락을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 때론 상대에 대한 섣부른 이해가 서툰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하겠지만 실패는 아니다. 그저 약간의 실수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게 사람의 매력 아닌가.


 적당한 관계라는 말처럼 듣는 사람의 감상이 달라지는 말도 없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일순간 균형을 잃으면 쿵 하고 떨어져 상처를 남긴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 사람이 편해지는 만큼 여유로워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줄타기가 쉬워지는 건 아니다. 한결같이 어렵고, 쉽다 생각하면 상처주기 일쑤다. 그러고 보면 상처를 주는 순간은 너무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데 화해의 순간은 또 유야무야 흐지부지 흘러간다.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금 줄에 올라있다. 어쩌면 인간관계는 애초에 적당한 기준을 알 수 없기에 크든 작든 한 번은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떨어졌다 한들 너무 낙담하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댄의 이야기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도 존재한다. 얼마나 아픈 건지, 약 먹는 모습은 못 봤는데 심하지는 않은 건지, 그냥 조그만 도움이면 될 거 같은데 저렇게까지 매몰차게 거절해야 하는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자세하게 보려 할수록 더욱 그런 상황 속에만 머물게 된다. 온전히 알 수 없다 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이 요동칠수록 카메라의 관점은 단단하고, 담담하 흔들리지 않는다. 고집스러운 댄의 성격처럼 말이다. 그의 고집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의 마음을 생각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댄의 이야기는 당연했다.


 그는 언제까지고 일하려 했다. 평생을 목수로 일해왔고, 지병만 아니었다면 몇 년은 더 일했을 것이다. 다만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일을 쉬어야 했다. 몇 가지 문항이 한 사람의 생애를 반영할 수는 없었다. 시스템이 그러지 못했다면 그 속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도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사려 깊지 못한 시스템은 타인을 불신하게 만든다. 이해를 위한 노력 자체를 무하게 만드는 몇 마디 말들.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시스템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아닌 통제의 기준이 될 뿐인 세계 속에서 댄의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당연한 권리를 얻어가는 데에도 스스로의 존엄을 해쳐야 하는 사회에 대고 그는 일갈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라고.


 온전한 이해에는 존중이 필요하다. 100%의 이해를 위한 기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아무도 할 수 없다. 존중은 이해의 출발선이다. 위치와 환경을 떠나서 필요한 선결조건이다. 켄 로치 감독은 적정 수준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 그는 구태여 화면을 이리저리 흔들거나 슬픈 음악을 배경에 두고 말하지 않는다. 현실을 이야기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적정기술처럼 적정한 수준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삶을 동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존중하는 이의 눈높이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르치듯 풀어내지도 않는다. 할 말을 할 뿐.


 그는 수십 년 간 필요한 이야기를 해왔다. 따스한 시선이 단지 동정심이 아님을 그는 영화 속의 인간들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동정하고자 했다면 슬픈 음악을 틀고, 비극적인 사연 몇 가지는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댄의 사연에 그런 건 없다. 무미건조한 사연에는 불합리한 몰이해와 처연한 분노가 남는다. 이해는 존중에서 시작하고, 적정한 사랑을 통해 다듬어진다. 진정한 문제는 오해가 발생하는 환경이 아니라 이해할 필요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시스템은 그동안 너무도 효율적으로 관계를 격리해왔다. 일말의 비효율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이. 켄 로치 감독은 그동안 신중하고 사려 깊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여전하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엔젤스 셰어: 천사들을 위한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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