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지 않으니 쓰고 싶다는 의지도 안 생기더라
글을 쓰고 싶으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씻어야 한다. 꼭 나갈 일이 아니더라도 옷도 갖추어 입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음을 먹고 이 상태까지 이르는 과정이 보기보다 무척 어렵다는 걸 미처 몰랐다. 막상 씻고 나면 신기하게도 힘이 난다. 일어난 김에 글을 모으고, 생각을 적고 다듬게 된다. 따지고 보면 일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글감 수집]
1. 비 갠 후의 오전 도로는 바닷가 느낌이 난다.
2. 아침 버스에서 남자들은 모든 색을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정장이며 교복마저 무채색이다.
3. RPG 게임에는 실업이 없다. 임금 체불도 없다. NPC들은 보수를 떼먹지 않는다. 그 세계 속 사회 구조를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4. 공동체 해체의 이유는 전세와 월세 시스템 속에서 거주 환경을 당연히 신경 쓰기 어렵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차피 1년 아니면 2년 살고 나갈 집 혹은 떠날 동네를 두고 구태여 환경 개선에 의지를 불태울 일이 생길까?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결국, 변화는 없다.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내가 잠깐 살았던 동네.
5. 1004번 버스에 대한 단상
-> 1004번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문득 앞쪽 문에 가지런히 놓인 파쇄 망치를 봤다. 집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저 사진처럼 이상적인 구도의 웃음을 듣거나 환경을 접할 수 없어도 매뉴얼 상 있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물. 그러고 보면 1004번 버스니까 버스 밖으로 내릴 때마다 천국에서 탈출하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 걸까.
6. 재밌는 것이, 우리는 버려지는 부분이 훨씬 많아도 꿈을 기억한다. 현실에 수없이 부딪혀 닳고 닳아버린 지금의 내가 꾸는 꿈이나 어젯밤 꿈이나 그런 면에서 보면 별 다를 게 없다. 온전하지 않아도 기억은 하니까.
7. 지속가능
-> 지속가능이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 지속가능의 기간은 도대체 언제까지 인지는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가. 몇 년을 꾸준하게 해야 지속가능일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평생 이루고 있는 건 지속 가능하게 숨 쉬고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8. 레몬그라스 향
-> 기묘한 향이다. 좋거나 싫은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향이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 다신 맡아보고 싶지 않다.
9. 좋은 표현이 생각났다.
->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땅거미진 어둠을 쓸어버렸다.
10. 어색한 상황에 적응하는 일
-> 연기와 반복으로 상황이 만들어지면 모두들 그에 적응하게 되어있다.
11. 소설을 만드는 하나의 상황
-> 치매에 걸린 독재자는 자신이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를 하나씩 잊어가기 시작한다.
12. 절대적 박탈감
-> 상대적 박탈감이 절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진다. 정보 습득의 채널이 너무도 많은 상황 속에서 우린 불필요하게 알게 되는 정보들이 너무 많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채널을 통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과정 속에서 각자의 위치는 시각적으로 굳혀진다. 영화 기생충으로 보면 냄새로 굳어지는 점도 있다.
13. 인트로
-> 우리는 도시가 살아있다 믿습니다. 살아있는 도시가 어떤 건지는 정확히 몰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니 그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살아있다는 생각, 살아있다는 믿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어떨까요? 생의 한 발자국 더.
14. 표현
->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드는 신발은 이내 축축해진다.
15. 관찰
-> 앞에서 손잡으라고 사회자가 재촉하며 이야기하니까 노부부는 겨우 서로 손끝만을 걸었다.
16. 편견
-> 편견을 없애라는 말로 교육할 것인가 존재하는 편견을 명확하게 이해하라는 식으로 교육할 것인가.
17. 차
가만히 차에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차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너무 빠르게 뛰어 일정한 흐름조차 느낄 수 없는
그 선 같은 고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