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부터는 좀 쓰겠죠 뭐.
글이 좋았던 이유는 도피처로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이 도피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의 드문 행적을 정리하는 감상이 너무 짧게 떠올라 의아했다. 문제의 원인을 찾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너무 간명했다. 문제의 구조가 확실하고, 깨끗한데도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문제를 보기 싫었다는 거였다. 이걸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언제나 글 쓰는 일만큼은 평온해야 했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등진 취미들이 얼마나 많은데 비로소 붙잡은 글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인지부조화의 상황 속에서 그렇게 6개월을 지냈고, 도피처가 되지 못한 공허한 글터의 주변만 맴돌다 떠나보냈다.
돌이켜보면 일이 많았다. 한 번은 20분 내외의 다큐멘터리를 그냥 만들어보고, 비정기 잡지도 한 권 만들었다. 월간지로 세 권을 발행해보고, 단행본은 네 권이다. 일을 위한 기회가 많이 만들어졌고, 가끔씩 영혼이 소진된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마저도 좋았다. 연말과 연초를 넘어가며 돌이켜 자랑할 일이 이렇게 많아졌으니까.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다. 그렇게 책을 만들면서 생각이 든 게 내가 확실히 연비가 안 좋은 차라는 점. 내가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뒹굴거리면서 연료를 많이 채워야 했다는 게 명확해졌다. 연료도 종류에 따라 달랐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낭비가 시간 낭비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누가 그랬는지 약 올라 죽겠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면 연료 파악도 잘못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영화 보는 일이 가장 큰 연료가 된다고 생각했다. 원체 영화를 많이 봤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이 봤으니까 익숙해진 취미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글쓰기가 목적이 되는 영화 관람으로 변하다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세상에 볼 영화가 그렇게 많은데, 보면 분명히 좋은 글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드는 영화도 있는데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글로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내 경험과 관찰이 부족해 덜 쓴 영화들은 그래서 아쉬웠다. 보는 일로만 영화를 끝내기엔 아쉬운데 글을 쓰는 일까지 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는 없었다.
시간을 내다 버려보니 뭘 하지 않고 쉬는 게 최고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군대에서 선임한테도 몇 번 들어봤는데(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좋은 말이었네. 생각을 끊어내고 명멸하는 불빛을 그저 바라보는 일. 생각 없이 웃는 일. 코인 노래방에 가서 혼자 노래 부르고 목소리에 집중해보는 일. 더럽게 사소한데 지키기는 또 어려운 일이다. 새해에는 덜 바쁘고 더 잘 일해야지. 좀 더 똑똑해져야겠다.
남들과는 관계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 글이 개발되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빠져나오는 동안에 도피처가 휴양지로 개발되어 버렸다. 휴양지에 사람이 바글거릴 때에는 비수기를 노려야지. 성수기가 지나가면 비수기도 온다. 도피처에서 휴양지로 격상한 글쓰기에 성수기가 지나갔으니, 비수기가 올 차례다. 없는 자리에 건질 것들이 오히려 더 많다. 내 영역 밖으로 퍼져나갔던 글이 다시금 나로 돌아올 차례다. 내 글에서 우리가 만든 글이 되어보니, 글이라는 게 더 재밌어졌다. 쓰는 일은 여전히 지옥 같은데 좋은 영향을 받으니 즐거운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