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감나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Oct 22. 2020

체크, 포인트

다시 비일상 속으로

 나이가 들수록 유사한 경험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애초에 체력이 떨어져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는 시간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한참을 당겨도 오지 않던 시간이 이제는 앞에서 질질 끌고 가는 모양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끄는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춘다. 앉아서면 쉬고, 눕게 되면 자고. 쉴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소진한 이후에 비로소 이렇게 새벽녘에 고요하게 글만 쓰는 시간을 독대한다.


 글만을 위한 시간을 몰아내었던 건 일상이라는 이름의 이격 없는 톱니바퀴였다. 빈틈없는 일상 속에 글이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었고, 일상을 글쓰기 위해서는 일상을 내려두어야 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는 손을 댈 틈이 없다. 하나의 틀로 엮이지 못한 단어와 문장들은 일상에 끼어든 구리스, 윤활유 같은 요소다. 톱니바퀴의 요철을 만지면 슥 묻어나는 누런색 구리스. 글을 쓰기 위한 소재로 모아두었던 그 문장 조각들은 구리스마냥 손에 묻어나면 쉽게 어버릴 수가 없다. 구리스는 어디 바지춤에 슥삭 닦아낼 수라도 있지만, 문장 조각들은 흰 여백이 아니라면 닦아내지도 못한다.


 때를 모르고 불현듯 터지는 기침처럼 새겨진 문장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 다시금 엉덩이를 붙이고 의자에 앉는다. 메모장에는 일과 계획들이 널려있다. '~해야 한다', '이게 좋지 않을까?' 이런 문장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쉽게 쓰이지만, 지우는 것은 항상 깜박깜박한다. 만드는 양에 비해 지우는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유효기간이 만료된 채 적체된 문장들은 한편으론 지우는 과정이 더 짜증스럽다. 해야 하는 일이, '했어야 하는 일'이 되었으니까. 영양가 있을 타이밍은 다 지난 메모들이다. 결국, 어느 비밀번호에 해당하는지 제대로 마킹도 못한 네 자리 숫자들이나 영문과 특수문자 단어 조합들 남는다.


 일상은 고되고, 이상은 멀리 있지만 상상은 일상에 좀 더 가깝게 두고자 했다. 사상은 언제나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선언이라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으니까. 오히려 거칠고 투박한 상상만이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미약한 균열을 낼 수 있다. 균열 나지 않던 일상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시지프스의 굴레와 같은 끝없는 고통 속에 자신이 마모되어감을 알면서도 견디는 것이 일상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희생으로, 때로는 직업 정신으로 빛 발하는 마음가짐의 근본은 버티어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상을 따라잡기 힘들었던 게 아니라 그 시침과 분침을 잡고 있기가 힘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끄적거린 생각의 편린이 홀로 남은 나침반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줄의 선언으로 내뱉고 싶은 말이 없었고, 써왔던 이력 도움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왔던 만큼 헤매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불안이 자판을 두드리는 손의 신경을 자극한다. 진득하게 하고 싶은 말을 붙잡고 늘어졌던 어제의 나는 온데간데없고 텅 빈 그릇으로 어떤 메시지도 담지 못하는 글이 이렇게 여백에 들러붙는다. 솔직한 글을 쓰고 싶은데 써야 할 말을 두 번 세 번 골라내고 있는 현실 속의 나는 무척이나 초라하다. 영화를 보고 생각을 글로 정리하던 때의 행복은 멀리 있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떠올라서 적었다. 여러 번 골라낸 글에는 무엇하나 진하게 남는 감상이 없다. 글을 썼을 때의 행복이 이제는 온전한 성취로 다가오지 않는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썼는데 결과는 비논리적인 불안증세로 귀결된다. 나조차도 마음속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해 혼잣말을 내뱉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계속해서 설득하려 애쓰며, 다독이며 내뱉었다. 어떤 상황에서 나는 점을 찍어야 할까. 촘촘하게 세워진 스케줄에 안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0년 전의 이 무렵이 생각난다. 수능 시즌에 무얼 외우고 기억했는지 남아있는 건 거의 없다. 그때도 일말의 성취를 만들어냈다고 행복해했던 것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말이다.


 이유 없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남아있을 기간이 필요하지만, 냉소가 가슴 속 한가득 들어찬다. 냉소적인 태도가 만능이라 생각하던 때는 지났지만, 불길 사그라든 잿더미를 뒤적이며 잔불이 겨우 내 몸이나 녹일까 우려한다. 글쓰기를 멈추지 말라던 말은 오래달리기가 끝나고 바로 앉지 말라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감속없는 급정거에 튕겨져나간 몸이 어디에 부딪혀 뒹구는 지 알 재간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올해의 출발점이 브레이크를 밟아 멈춰있던 시간이었던 거 같다. 중요한 걸 많이 잃어버린 거 같은데,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