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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Jan 17. 2020

결혼 이력서

영화 '결혼 이야기'

이력서를 쓰는 일, 어렵다.


 자기소개, 성격의 장단점과 가정환경. 뭐 하나 매끄럽게 기억해내기 쉬운 일이 없다. 무턱대고 쓰다 보니 평범한 사람 중에 평범한 사람일 것 같고, 그게 또 어느 정도는 맞기도 하니 이것 참 고민스럽다. 그렇다고 그렇게 쓰면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지 싶어 북북 지운다. 뭐가 좋을까. 당신의 입장에서 왜 내가 되어야 할까. 이력서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는 일이 고통스러운 건 결국, 내 삶에 조금씩이라도 후회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저때는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싶은 선택들. 1%의 후회도 없었던 건 체념을 했거나, 다른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웠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썼던 이력서가 10년 다닌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시점에서는 기억이나 날까? 그렇게 해본 적은 없지만 그때 가서는 막상 입사 당시에 그렸던 꿈보다는 부닥친 현실이 더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찰리와 니콜 커플의 혼 조정 과정을 보니 꼭 그 모습이 생각났다. 이혼의 과정 또한 내가 썼던 이력서를 뒤져보는 일이나 별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다 잊어버렸던 이유들과 '그땐 그랬지'하는 감상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썼던 내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현시점에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래도 찰리와 니콜은 서로 가급적이면 좋게 좋게 관계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예 다시는 안 보겠다는 각오로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만 정리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황은 꼬였다. 어찌 되었든 관계 속에 절차가 들어가고, 절차 속에서 감정은 이 관계를 정리하는 데 있어 별 도움되지 않는 데이터였다. 감정은 사치였다. 법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감정쯤은 한 번에 탁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서늘했다. 그래. 서로 싫어졌으면 안 보면 그만이다만, 아이와의 관계는 어찌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보고, 어디서 보고, 언제 볼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절차 속으로 들어간 서로의 행동은 진흙탕 싸움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겠는가. 누가 시작했든 상대를 존중하며 볼 수 있는 끝은 아니었다. 깎아내리지 않는다면 아이를 볼 수 없을 테니. 부적격을 검증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격이 없다고 말해야만 했다.


 아프다. 분명 아픈 일인데 그렇게 해야만 했다.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좋게 마무리하려던 생각은 오기로 변한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라고 다짐하며 독하게 품었던 감정이 폭발한다. 주체하지 못하는 표현들이 넘나 든다. 새록새록 기억난다. 상대가 몸서리치며 싫어할 말들이 떠오른다. 상처 받을 표현은 널리고 널렸다. 내가 당신을 아니까. 그만큼 오래 봤으니까. 그렇게 한번 크게 베어 넘기고 나면 간극이 보인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서로를 밀어붙이며 쏘아댔을까. 원망하고 비난하려던 것만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당신은 나를 좋아했던 이유로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니었던 이유로 나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불행이 있고, 또한 납득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 어떤 형태였든 이 부부의 결혼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었다. 둘은 정말 솔직하게 각자의 이력서를 채웠다. 그걸 읽는 목소리도 따뜻했다. 체념해서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서 충분했다. 체면치레하며 점잖게 멀어지며 새 출발을 그리는 일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구질구질대는 표현이어도 이렇게 솔직해야 더 좋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린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때의 그 시간을 인정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묻어두지 않은 관계에는 열매가 맺힌다.


 이력서를 뒤져보는 것처럼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옛날의 마음을 찾아보는 일. 물론 초심을 기억하는 지금의 내 환경은 그때의 마음을 떠올려내기엔 너무도 달라졌다. 배고프고, 추웠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으니 그 시절의 마음을 담아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서툴게 어필하고자 써 내려갔던 이력서의 한 줄 한 줄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내 모습은 없었으니까.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싸웠던 만큼 이해하고 보냈던 과거의 이유들을 마주하는 일. 익숙해진 만큼만 바뀌어오니까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일이 어려웠던 거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에 이르러서야 확인하게 되는 진심. 그러고 보면 빛의 속도로 움직이지 않아도 시간은 충분히 상대적이다. 그러니 함께 보아왔던 시간이 지금에 이르러 서로 다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어색하거나 생경한 일은 아니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결혼 이야기(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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