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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r 01. 2021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영화 '소셜 딜레마'

 10년 전에 대학 방송국에서 처음 제작한 방송의 주제가 SNS였다. 수습 기간을 마무리하면서 팀을 이뤄 SNS에 대한 20분짜리 오디오 방송을 만들어와야 했다. 2011년은 페이스북이 알음알음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할 때였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가 2010년에 나왔으니 SNS는 더없이 시의적절한 주제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다양한 기능들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런저런 피드에 댓글이나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지금처럼 사용자를 분석하고, 어떤 경로로 유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광고 페이지가 담벼락을 잠식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어떤 논조로 방송을 마무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결론의 주장들이 희미하다. 기억이 희미한 걸 보면 판단이 그다지 명쾌하진 않았던 거 같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

 구글과 페이스북의 오류와 잘못에 대해 성토하는 다큐멘터리는 많이 있었다. 사용자의 위치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고들이 있었고,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단발적인 사고가 이어지면 일련의 사건이 된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볼 수 있던 문제들은 주로 개인 정보의 불법적인 활용에 대한 문제였다. 개인 정보의 불법적인 활용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플랫폼의 사용자 추천 서비스를 문제 삼는다. 사실, 문제의 발생 여부보다 중요한 건 '문제의 인식'이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왜 그 주제를 문제 삼고자 했는가?' 이런 질문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관점의 이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들과 이 다큐멘터리가 본질적으로 다른 지점은 내부인들의 고발이었다는 점이다.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구글의 '전' 디자인 윤리학자, 페이스북과 핀터레스트의 '전' 임원, 여타 IT 업계에 몸 담았던 사람들이 하나의 자정작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게 흥미로웠다. 저들의 입장에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전 임원 정도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문제에 대해 동일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한 결심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플랫폼의 규제받지 않는 막강한 힘에 집중한다.


 소셜 미디어는 일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SNS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을 만들어가면서 소셜 미디어는 그에 맞게 관심사와 부합하는 광고를 제공한다. 심리를 파악하고 자극하는 방식은 우리가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치밀하다. 소셜 미디어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당신에게 맞춰져 있다.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줄 것이고, 되고 싶어 하는 걸 보여준다. 정보 제공은 동일하지 않다. 애초에 동일할 수가 없다. 광고의 조회수가 올라야 기업은 돈을 번다. 벗어날 여지를 만들어두지 않는 건 그 세계에선 당연하다. 당연하지 않은 일은 일상에서 벌어진다. 매일같이 보는 가족들 사이에는 오히려 나눌 이야기가 없다.

영화 '트루먼 쇼'

 하루에 몇 개나 되는 광고를 지나쳐야 하는가. 그 광고가 대부분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 심해질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다행히 핸드폰을 내려놓는 선에서, TV를 끄거나 라디오를 끄는 선에서 해결되지만 말이다. 차라리 대면해서 만져볼 수 있는 전단지가 훨씬 매너가 좋은 편이다. 구겨버릴 수라도 있으니까. 블랙미러에서 봤던 세계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광고를 꺼버리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 물건을 사지 않고서도 이용에 불편이 생기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감내하고 있다. 딱 광고 제거를 위해 결제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플랫폼에 따라 다르지만 몇몇 소셜 미디어는 단지 본인들이 원하는 광고를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게시물을 광고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뒀다. 소액으로도 효과적이다. 원하는 옵션을 붙여 광고할 수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어느 누가 포기할 수 있겠나. 해악이나 유해성을 논하기 이전에 삶에 필수적인 요소가 이미 되었으니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다. 관심사를 스크랩해서 업로드하고, DM을 보내 소통하고, 상호 간에 친구가 되어있다는 게 어떻게 보일지는 명확하다. SNS로 친구를 맺은 사람을 실제로 알고 있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용자들이 직접 자신을 효과적으로 광고하기에 좋은 무대가 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불안과 갈증을 팔아서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지 못할 것은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불편한 감정은 구매를 자극하고,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당해내는 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당신이 아는 것보다 정확하게 당신의 욕구를 자극하는 글과 광고에서 능동적일 수는 없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삶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며든다. 막상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도 그러니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선뜻 누구에게도 해줄 수 없다. 문득 제니 홀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소셜 딜레마', '소셜 네트워크', '트루먼 쇼'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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