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큐멘터리 '가버려라, 2020년'
다사다난했고, 절망스러웠던 2020년이 갔다. 무기력과 절망감은 여전하지만 아무래도 새해가 되면서는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 여전히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고 5인 이상으로도 만날 수 없지만 그래도 새해니까. 모두가 마냥 기다리며 지난해를 보내지는 않았다.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기준을 만들어 비일상적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화상회의는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했고 갖가지 용어들이 코로나19 환경 속에서 새로이 태어났다. 변화는 아픔을 수반한다. 혼란 속에서 피어난 단어들은 그 아픔의 씨앗이다. 그리고 아픔은 분노로 발화한다. 찰리 브루커는 발화의 그 미묘한 감정을 날카롭게 잡아챈다.
코로나19가 창궐했던 2020년에 대한 회고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고통과 슬픔 속에도 유머는 담겨있다. 우리는 현재를 책임지지 않는 이들에 분노한다. 더불어 자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모르는 이들을 조소한다. 분노 이전에 비웃음이다. 그 비웃음 속에는 갖가지 인간 군상이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형화된 인물들과 그 태도. 영상 오프닝에 일찍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잘 짜인 '코미디 이벤트'다. 특유의 냉소적인 표현법으로 2020년을 겪어내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을 대면한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학자, 정치인, 시민의 모습이다. 태도나 언변이 익숙하다기보다는 그들의 얼굴이 친숙하다.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나와서 흉내를 낸다. 2020년의 사건들을 익숙한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어쨌거나 역사적인 해가 되어버렸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남겨야 하는 걸까? 2020년은 코로나19를 제외하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시간이었다.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만 그만큼을 배웠다.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 필요해졌다. 2020년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것도 그런 새로운 차원의 접근법에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겪어내고 있는 시점에서는 모르지만 많은 것을 지나 보내고 나서는 성찰할 여유가 생긴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어도 이야기는 다양한 관점으로 창작되어야 한다. 고통과 아픔까지도 그 속에는 담겨야 한다. 숫자 너머의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추억이 되는 기억은 무뎌지기 마련이니 무엇보다 지금의 순간은 정확하게 적혀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값진 건 어떻게 현재 시점을 버텨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원망과 혐오가 가득한 시대를 이 영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무지와 분노를 정조준해 그 민낯을 벗겨낸다. 배우들의 역할극은 같은 시간을 보낸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데 특화되어 있다. 공동의 위기의식은 부재했다.
씁쓸한 블랙코미디가 일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낸다. 날카롭게 관찰하지만 지난 시간을 뒤적여 비난거리를 찾아내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을 비판하는 경계에서 유머를 잃지는 않는다. 어떤 멍청한 짓을 어떤 멍청한 사람들이 했었나. 그저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재연만으로도 충분했다. 원색적인 비난보다 거리를 두고 묘사하는 일이 더 낫다. 적어도 그 속엔 최소한의 인간성이 있다. 2020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좁혀질 수 없는 의견의 간극을 봤고 불안은 끝이 없었다. 절대적인 선악은 사회에 존재하지 않고 시스템에는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현실 세계는 거짓말처럼 픽션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픽션스러운 결말을 원하면 너무 감상적인 걸까? 차라리 2020년을 한 편의 끔찍한 꿈으로 여긴다면 말이다. 꽤 많은 과정을 거쳐 결말을 보기 직전에 서있다고 믿고 싶다. 이 영상의 결말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사진 출처 : IMDB 'Death to 2020'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