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Q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Mar 08. 2021

앞으로의 일, 아플 일

영화 '자기 앞의 생'

 작년 말에 집을 옮기고 나서 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옮기는 경험이 낯선 것은 아닌데 이번엔 상당히 생경했다. 옮긴 공간이 좋아져서 새롭다는 것보다도 일상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니 보이는 게 많아져서 그런 것 같았다.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이라든가, 집 주변에 있는 편의점의 위치라든가. 동네에 특이한 가게들이 뭐가 있는지 탐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일상을 살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 살던 원룸은 대충 다섯 걸음이면 문 앞에서 베란다 세탁기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 집엔 내가 모르는 이름이 없었다. 모르는 아픔도 없었다. 그런데 집이 바뀌면서는 당최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집이 낯설어졌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아플 일이 두려워졌다.

모모와 마담 로사

 낯선 공간에는 의외로 무언가를 들이기가 더 쉽다. 견고하게 지어진 일상에도 우연한 만남은 찾아든다. 마담 로사와 모모의 인사는 달갑지 않았다. 모모는 시장 바닥에서 마담 로사의 은촛대를 들고 도망쳤고, 하필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역할로 다시 만나게 된다. 마담 로사는 매춘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담당 의사였던 코엔 선생님은 모모를 마담 로사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담 로사는 버릇없는 아이가 내키지 않았지만, 간곡한 부탁과 적절한 협상에 넘어간다. 어쨌거나 보육원으로 보내는 것보다는 처지가 나았으니까. 집으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던 건 모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모는 밤거리를 배회한다.


 아이는 자신의 거취가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들었다. 뭐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끈 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부자연스러운 동거는 의도도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흘러간다. 마담 로사는 일견 수상한 면모가 있었다. 비밀스러운 숫자 암호가 팔목에 적혀있고, 밤마다 동굴로 들어갔다. 종종 마담 로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 모모에겐 별 일 아니었다. 누구나 비밀을 갖고 사니까. 이따금 터놓지 않은 이야기들은 터놓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이 되곤 한다. 애써 숨기려 해도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은 연약해진다. 마음속 한가운데 있는 이야기조차 지키지 못할 만큼.


 마음속에 깊숙하게 묻어뒀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은 썩 유쾌하진 않다.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지만 비밀이 묘한 이유는 그 지점에 있다. 별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던 이들이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은 가족과는 다르다. 혈연, 지연, 학연의 연결고리가 닿는 영역 밖의 아무 사이 아닌 이들에게 비밀의 무게는 오히려 가볍다. 털어놓고 난 뒤의 해방감은 순수하게 서로를 연결 짓는다. 우린 아주 사소한 규칙과 의미를 매듭지으며 친구를 만든다. 아픔 너머로, 아픔을 건너 눈물 섞인 비밀과 마주하며 삶을 마주한다.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해하고 연민하는 삶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한다.

소피아 로렌

 연민이나 동정이라는 말을 쓰기가 퍽 조심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권리의 문제일까 아니면 친밀감의 문제일까. 어떤 방식으로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기꺼이 마음을 받는 일도 기꺼이 마음을 주는 일도 꺼려진다. 그러다 보면 많은 게 무뎌지고 당연해진다. 홀로 버티는 세상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삶의 난이도가 쉽고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쉽다는 말이다. 내가 결정하는 나의 삶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한다. 선택의 속도가 빨라지면 감상이 사라진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처럼 인생의 다음 장을 넘기는 데 거침이 없다. 삶에 사람이 더해지면 속도는 줄어든다. 서로 발은 맞춰 걸어야 할 거 아닌가.


 마담 로사의 목소리는 점차 느려진다. 더불어 모모가 마담 로사의 곁에서 지내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 속도에 맞춰 걸으면 자연스레 마담 로사의 눈을 응시하게 된다. 상념에 빠져있다가 모모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는 모습, 아픔 속에서 헤매는 손짓 너머의 공허함을 눈으로 담는다. 처음 볼 때와 두 번, 세 번 볼 때의 느낌이 다르다. 눈으로 읽어 아는 아픔이 머리로 느껴졌다가 마음으로 내려간다. 가족이란 말을 쓰지 않고서도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는 완성된다. 눈물로 얼룩지은 팔뚝을 베게끔 내어준다. 알진 못해도 그렇게 있을 수는 있다.


 언제나 더 나은 삶의 단서는 존재한다. 크든 작든 시간을 주면 집은 제 나름대로의 결말을 맺는다. 오랜 집을 보내고 새로운 집을 맞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앞의 생, 앞으로 남은 생. 앞으로의 일과 아플 일이 비슷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자기 앞의 생', '소피아 로렌'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