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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Apr 25. 2021

살아남은 자들의 길

책 '흑산'과 영화 '자산어보'

 모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던 군대에서 유일한 낙은 글이었다. 언제 멈출지 알고 있는 레이스에 나는 구태여 조급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일과 이후에는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때의 글은 땀에 절은 노트의 빛바랜 색이 좋아 몇 번이고 다시 들춰보곤 한다. 어려서 쓴 글은 지금보단 더 반짝거린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뭐든 배우고 싶던 것 투성이었던지라, 명언이나 좋은 시구절도 무더기로 적어두기도 했다. 그 일말의 향이라도 내 기록에 스며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개중에는 노력해도 닮기 어려운 글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견뎌냈는지 가늠조차 어려운 건조하게 메마른 고목 같은 단단한 글이었다. 두툼하게 부푼 종이 사이의 잉크가 먹으로 번지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글. 그 글은 흑산에 있다.


 책 '흑산'은 정약전의 유배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바닷가 근처에 갇혀 글 쓰는 일이 낙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귀양살이나 군대살이나 처지가 비슷했다. 하필 군대가 해군인지라 더 그랬다. 흑산이라는 곳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활자가 끊임없이 감각을 자극했다. 그 책에는 마음속에 박히는 한 문장이 있었다. '대학에도 근사록에도 매의 고통은 나와있지 않았다'. 이 말이 내겐 가장 귀한 구절이었다. 종이와 먹에 파묻혀 있던 사람은 지극한 고통으로 삶을 이해한다. 매 맞아 헝겊과 엉겨 붙은 핏덩이의 감상은 누구도 책에 새기지 않았다. 책에 담길 정도로 고상하지 못한 일이었을지 모르나, 누군가에겐 일상이었을 텐데 말이다. 글에서는 피와 똥, 그리고 땀 냄새가 났다.


 영화를 보면서 한참 전에 읽었던 그 책과 글이 기억났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아우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갔다. 위기를 느꼈던 세도가문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면 더 위험할 것이라 여겨 눈앞에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정약전은 처음 압송당할 때부터 작심을 한 듯이 결연해 보였다. 머나먼 길을 가면서도, 깊고 어두운 섬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랬다. 생경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의 눈은 오히려 빛났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미래는 과거의 세계와 달라서 더 귀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이었으니까.


 염원하던 세상이 무너져도 정약전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무너진 세상을 향해 애정을 품었다. 그렇기에 정약전은 끊임없이 이유를 묻는다. 서책을 벗어나 문자 너머의 세상을 개척해나간다. 답이란 것이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질문에는 막힘이 없다. 막힘없는 질문은 어린아이의 시선에 가깝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해하는 아이의 태도를 닮는다. 아이의 질문은 모든 답변에 열려있다. 반드시 정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응답이면 족하다. 그는 어린 소나무를 베어내는 이유를 묻고, 가오리는 홍어와 어떻게 다른지 묻고, 학문의 이유를 물었다. 명백한 답이 보이는 일에도 질문을 던졌다.


 학문의 이유라니 너무 간단한 질문이다. 묻는다면 응당 입신양명이라 답할 것이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고 법도니까. 수탈과 착취의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뺏기지 않으려면 뺏을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서야 한다. 그게 전부다. 그건 채울 수 없는 그릇을 채우고자 하는 미련이다. 바다만큼의 욕심이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이유는 갈증의 본질이 아니다.


 색을 들어낸 세계에 명암만이 남는다. 저 세계는 다양하지 않다. 단일한 사상으로 힘을 얻는다. 그 세상에 흑백논리는 절대적인 진리다. 아군이 아니면 적이다. 다양하지 않은 세계에 색이 빠지는 건 순리다. 어내서 드러난다. 200여 년 전의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대를 초월해 관찰하게 된다. 저 사회는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가. 정약전의 행보는 지금 어떤 이유로 다시 그려지는가. 여전히 학문은 입신양명의 길인가? 아니라면 배움의 길은 무엇을 향하는가. 없는 색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흑백의 영화는 무슨 의미인가. 수많은 질문들이 던져졌으니 답을 찾아야 한다. 운명신의 질문이라 여긴다면 더욱더 열심히 찾아야 한다.


 시대의 젊은이들은 다들 엇비슷한 생각을 하나보다. 사회의 부조리를 어떻게든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보고자 한다.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고, 이해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 결기에도 불구하고 사회라는 체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익을 이상이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실패할 일임을 알면서도 도전해야 한다는 걸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시도 후에 부서지는 파편들이 길을 낸다. 그 길이 무엇이든 어쨌거나 가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니까. 창대의 결심과 의지, 부딪혀 겪어내는 모든 사회의 부조리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시대극의 목소리가 현재의 사회를 묘사하듯 펼쳐진다.


 극이 끝날 즈음에는 신이 잠깐 데려가서 묻는 듯했다. 너는 여태 무얼 해왔느냐고. 뭘 배웠고, 세상에는 어떤 씨앗을 남기고 있냐고. 지금의 선택이 운명에 대한 답이라면 답을 내린 이유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좋은 질문들을 받았으니 언젠가 이유를 찾게 되면 그때는 지나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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