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책

영화 '행복한 사전'

by wanderer

예전에는 내가 아는 단어 하나 하나에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그 자부심은 누군가에게 아는 척을 할 때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그동안 단어의 뜻이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서 단어를 알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환경이 바뀌게 된다. 나는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내가 아는 것은 전부 쓸모없는 것이었고, 나는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했다. 게다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혼자 알아볼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봐야 했고, 말로만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은 깨져야 했다. 가령, '눈치'라는 개념을 말로 알아듣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말로 알아듣기가 힘들었고, 덕분에 실컷 구르면서 적당히 '눈치'와 타협하는 데에 성공했다.(내 선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눈치'라는 말처럼 마법처럼 통용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서, 단어 본연의 맛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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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원이라고는 달랑 네 명이 전부인 사전 편집부에서 '대도해'라는 새로운 사전 제작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런데 사전 제작은 결코 만만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영화의 배경은 1995년인데, 사전 편집부는 직접 용례를 수집하고 단어의 뜻을 종이에 써야 했다. 그렇게 사전 편집부의 사람들은 직접 발로 뛰며 사전을 만들어 나간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전'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생생한 단어들이 있어야 했다. 직접 실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그런 단어들 말이다. 물론, 단어를 채집하고 다른 사전들과 비교하고, 사전에 실을 표제어들을 고민하는 작업은 굉장히 심심한 작업이다. 참 지루하고, 단순한 일이고, 전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사전을 만든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 일이 어떤 일인지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 새로운 부원이 들어오고 처음 갖는 회식 자리에서, 사전 편집부의 편집 주간인 마쓰모토는 모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줄 말을 찾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단어의 바다, 사전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한 척의 배. 항해의 끝이 누군가에게 닿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이 '대도해'라는 사전은 매력적이다. 사전이라 하면, 언제나 먼지를 먹고 있는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있지만 이 사전은 대담하게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전'이라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다. 대도해는 소통하고,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이 되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영화의 주인공인 마지메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으니, 오로지 책에만 파고들어 사는 그런 사람이다. 한 가지의 의미로 설명 가능할 것 같은 그 사람이 사전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용례가 더해지는 것처럼 변하는 모습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세상에 어떤 단어라도,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오른쪽'의 정의를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북쪽을 향하여 섰을 때 동쪽과 같은 방향'. 이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북쪽', '향하다', '서다' 등의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왼쪽의 반대 방향'이라고 했다가는 순환논법에 빠진다. 왼쪽의 반대방향이라면, 왼쪽은 그러면 어떻게 정의하겠다는 말인가. 모든 단어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해준다. 서로의 설명을 통해서 단어는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전은 '공존의 책'이다. 서로가 있기에 존재한다.

새삼 느끼는 사실이지만, 사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있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은 4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한참 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태연하게 주변의 사물들과 어울리며 책장에서 무게감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이 분이 활약할 일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전은 그의 존재 자체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알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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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끝이 단어를 만진다는 것은 세계와 접하는 기쁨이라 할 수 있지. 그게 사전 편집의 참 맛이야.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행복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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