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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자정리 Mar 31. 2021

금연 11년, 다시 만난 첫사랑

나의 담배 연대기

 담배를 끊은 지 11년, 햇수로 12년 차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워 36살에 담배를 끊었으니 얼추 17년 넘게 애연가로 살았었다. 담배를 끊고, 비흡연자였던 기간이 끽연했던 시간보다 적다니, 꽤나 오랫동안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피워왔던 셈이다. 


 어쨌든, 혈압약을 먹기 시작한 해부터 담배를 끊었다. 흔히들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농담도 있는데, 병원에서 혈압약을 평생 먹으라는 진단을 받고 바로 그다음 날부터 담배를 끊었다. 그렇게 담배와는 매몰차게 하루아침에 이별했다. 



편의점에서 다시 만난 반가운 '88' 광고 


 며칠 전, 마실 것을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발견한 '88' Returns. 다시 돌아온 '88'이라니 파란 시그니처 색과 그 위 남대문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에 아리게 헤어진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듯한 반가움이랄까? '88'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담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던 나란 녀석이 친구들과 미래를 고민하며 똥 폼 잡으며 피기 시작했는데... 훗! 지금 돌아간다면 노담(No-담배) 할 것 만 같다. 살아보니 담배 자체로는 백해무익(益)이라는 말을 공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스트레스를 푼다고들 하지만 그저 허울 좋은 핑계일 뿐. 


 '88'을 시작으로 다음으로 바꾼 담배는 그 후속작인 'This'였다. 'This is this'라는 실없는 농담을 유발하는 브랜드였지만, '88'이 단종되고 나온 터라 딱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1년 동안은 지겹도록 멘솔 담배를 피웠다. 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University Whashington ESL에 가까운 타바코(담배) 샵이 있었는데, 브랜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멘솔 담배를 1+1으로 팔았었다. 당시, 말보로 담배가 4달러가 넘었는데, 그 타바코 집의 주인은 중년의 한국분으로 돈이 없어 보이는 내게 친절하게도 가장 저렴한 그 담배를 권하셨다. 


 없는 살림에 단비를 내어 주는 주인아저씨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4달러가 채 넘지 않는 멘솔 담배 1+1을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애용했다. 사실 돈 없는 연수생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로 그 만한 대안도 없었다. 주말에 담배가 떨어지면 비싼 담배만, 아니 저렴한 1+1을 팔지 않는 근처 편의점에서는 도저히 돈이 아까워 살 수 없었고, 월요일이 되기 전까지 꾹 참았었다. 

 

레종(블루) 초기 출시 디자인


 어쨌든 연수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KT&G에서 고양이가 그려진 감각적 디자인이 눈에 띄는 'RAISON'(레종)이라는 새로운 담배를 출시한 때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양담배 수입 자율화 이후, 국내 기업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다양한 브랜드와 상품을 출시 했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나, 맛뿐만 아니라 타르의 함량에서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레종'은 중간쯤으로 내 기준으로는 잘 맞았다. 


 '레종'은 프랑스어로 이유라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으로 담배 '레종'은 그런 의미에서 좀 더 특별했고, 맛도 적당해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레종을 태운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의 감성에 무엇하나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왠지 모를 착각을 했는지도. 훗. 

('Raison d'etre'는 존재의 이유로 번역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주요한 Key-word로 언급되며 하루키 문학의 근본이자 철학적 물음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온 '88'로 촉발된 나의 담배 연대기에 촘촘히 연결되어 있던 기억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다시, 담배를 태울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담배를 물며 연기를 내뿜던 그때 고뇌와 감성은 여전히 아련하다. 하지만, 아련한 첫사랑마저 잊혀 간다. 





 '레종'은 2010년 담배를 끊기 전까지 피운 담배였다. 초기에 레종을 한 갑 사면 19개비 외 한 개는 필라멘트에 특정 문양이 프린트가 되었었다. 맛이 특별히 달랐던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한 개비가 더 특별해지는 재미를 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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