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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Apr 21. 2024

금수저가 달리 금수저인가

가난이 두렵지 않은 이유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던 때, 가난의 절벽 끝까지 가봤더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잘 사는 집이었다. 갖고 싶은 걸 못 가져 본 적이 없다. 남 부러울 것 없이. 그러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무리하게 확장한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작은 집, 더 작은 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마침내 아빠네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사실 건물이라기엔 뭐 하고 가건물이었다. 임시 거처, 달리 말하면 가난 피난소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난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학교에서 멀리, 더 멀리 떨어질수록 등하교 시간은 길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사이에 펼쳐진 수많은 길들이 내게 즐거움을 주었다. 오빠를 만나기 전, 두 번째로 행복했던 시간을 고르라면 학창 시절을 꼽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답을 찾자면, 70%는 우리 엄마 덕일 것이고, 30%는 천성이 밝은 내 기질 덕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빠를 정서적 금수저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결이 다르다. 우리 아빠는 성질이 대단했다. 지금도^^) 엄마는 웃음과 눈물 모두 대단히 많고 다분히 감성적이다. 머리가 이제 막 컸을 20대 초반에는 그게 싫었는데, 지금은 그런 엄마가 존재 자체로서 좋다.

어릴 적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아직 우리 집이 망하기 전) 아침 등교를 준비하던 어느 날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다가 물통을 바닥에 전부 쏟아버린 일이다. 울컥울컥 쏟아진 물은 식탁 밑은 물론 냉장고 밑이나 선반 아래로 까지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게다가 그냥 물도 아니고 어딘가 건강에 좋다는 정체 모를 ‘무언가’를 끓여 만든 보리색 물이었다. 그때도 알토란이 있었나? 어쨌거나 학교 갈 준비를 하던 초딩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아침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봐도 대참사라 엄마가 버럭 승질을 낼까 바들바들 떨던 나는, 이어지는 엄마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으응~ 잇다야 괜찮아~ 엄마가 치울 테니까 학교 갈 준비 해~” 그 다정한 말투와 적당히 듣기 좋은 톤은 뇌리에 깊이 박혀 서른을 앞둔 지금까지도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는데, 우리 엄마는 소녀 그 자체다. 제일 좋아하는 건 꽃구경 아닌 나무 구경이다. 형형색색 화려한 꽃보다 가만 그 자리를 지키며 변치 않고 서 있는 나무가 좋단다. 엄마가 내게 딱 그런 사람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좀 힘들 때 말고는, 늘 밝고 순수하고 선한 영혼이었다. 혹여나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내가 기죽을까 무리해서라도 용돈을 넉넉히 챙겼고(그렇게 자라 소비 습관이 엉망이 되었고.. 지금은 많이 나아짐^^) 매일을 웃음이 피고 즐거운 날들로 만들어 주셨다. 덕분에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가난이 두렵지 않다.

특히 아빠 사무실은 화장실 시설이 변변치 못해 큰 대야에 돼지꼬리 히터(우리 엄마가 너무 심각하게 가난해 보인다고 남들한텐 비밀로 하랬는데)를 놓고 물을 끓여 씻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그냥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이 끓을 때까지 춥고 지루하고 귀찮기는 하나, 씻으려는 나 보다도 엄마가 먼저, 더, 전전긍긍이었기 때문이다. 혹 내가 추울까 봐, 힘들까 봐 말이다. 그 따듯한 마음 덕분인지 쌀쌀한 공기는 금방 후끈해지는 것 같았다.



​​​

한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엄마가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엄마가 챙겨 온 우산을 쓰고 두 우산이 머리를 맞대고 걸었다. 그러다 우리 앞으로 축 처진 어깨로 비를 잔뜩 맞으며 걸어가는 남자애가 보였다. 당시 내가 고등학생이었고 걔는 좀 더 작고 약해 보였으니 중학생 정도는 됐을 거다. 순간 ‘우리 우산이라도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데,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아이를 불러 세웠다.





“얘야, 우리는 우산이 두 개니까 너 하나 쓰고 가” 급식비도 몇 달씩 연체돼서 담임선생님과 면담하기 일쑤인 나와, 이미 쫄딱 젖어 지금에 와서 우산을 쓴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을 아이 사이에서, 우리 엄마는 쓰고 있던 투박한 무지개 우산을 건넸다. 걔는, 그 아이는 작고 초라해진 어깨가 조금 펴지는 듯하더니 젖은 머리를 낮추어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났다. 엄마의 무지개 우산을 쓰고.

엄마는 어릴 때부터 요즘에 이르기까지, 줄곧 내게 글을 쓰라 말했다. 내 글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어떤 풍자와 재미와 에너지가 있다고. 엄마는 내가 작가가 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종종 ‘볕 든 날’ 같은 단어에 꽂히면 종일 나를 보챘다. “잇다야, 나중에 작가가 되면 꼭 볕 든날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봐. 얼마나 멋지니. 볕 든 날 이라니. 정말 좋다. 알겠지? 볕 든 날! 꼭, 꼭!”

우리 엄마에게도 볕 든 날이 올까.


엄마, 나는 볕 든 날 같은 건 아주 흔해. 엄마에게 인생에 볕을 들게 하는 법을 잘 배워 놔서인지, 채이고 채이는 게 행복이야. 무뎌질 법도 한데 때마다 감사해. 내겐 엄마가 볕일지도 모르지. 요즘은 친오빠랑 나랑 엄마랑 셋이 모이면 오빠 손을 더 꼭 붙잡는다는 걸 알지만, 엄마가 우리 모두를 애지중지 키운 것도 알아.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거, 부모자식 간에 흔한 말 같아도 실은 결코 흔하지 않잖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가 되는 기쁨은, 두고두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이제는 내가 조금 자라, 키가 작은 엄마를 내려다보는 어른이 되었어. 엄마가 보여준 사랑만큼은 어렵겠지만, 앞으로는 내가 엄마를 지켜줄게. (친)오빠랑, 남편이랑, 나랑 모두가 든든하게 지켜줄게. 엄마에게 매일매일 따듯한 볕이 들도록 말이야.

이런 나를, 이렇게 큰 나를, 금수저가 아니면 뭐라고 하겠어.

*우리 엄마 자주 하던 말

 “우리 잇다는 아시아 대표 미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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