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집, 집을 거치며
투자 목적으로 신혼집을 매도하며 오랜만에 월세살이를 하게 됐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잘 살고 있던 집을 팔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걸 걱정하셨지만, 사실 나는 무지 신이 났다. 일단 연애하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게 가장 크고, 뭔가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내 집'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도 좋다. 연애 시절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옛 생각이 난다. 여러 지역을 돌며 월세살이 하던 지난 날들. 돈벌레가 나오는 오래된 1.5룸, 월 2만원짜리 관사, 오피스텔, 20년 된 아파트, 4층짜리 빌라 등 성인이 된 후만 해도 여러 곳에서 살아봤다. 집, 집, 집을 거치며 수많은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의도하진 않았으나 무의식 중에 '어떻게 살아야 더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떠돌이처럼 여러 곳을 돌며 약간의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했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니 그랬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크게 기쁘거나 행복한 일이 아닌 이상 기억은 사라지고 드문드문 옅은 감정만이 남았다. 그 안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얼 좋아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어떤 장소를 좋아하고 어떤 곳을 걸었을까. 누굴 편안해하고 누굴 좋아하고 누굴 따랐을까. 분명 여러 날들의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을 텐데.
취업 준비와 첫 직장 생활, 그리고 몇 번의 이직. 벅차기도 고생스럽기도 부담스럽기도 했고, 반대로 설레기도 재밌기도 감사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아- 대견하다.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잘 해냈는가. 상상으로나마 어린 날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잘했다고, 장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나는 외로움을 잘 느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여태껏 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만 외로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수많은 이사도 직장도 경험도 (오빠에게 도움 요청을 할 때 빼고는)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하려 했다. 또 다른 내가 응원해 줄 수도 있었는데. 과거의 나에게 참 미안하고 고맙다. 그래, 내게 있어 나처럼 좋은 친구가 또 있을까. 내 영혼을 여러 개로 쪼개어 나누어, 무럭무럭 키워내서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나를 다른 내가 도와주면 좋겠다.
한편 다른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절실히 느낀다.
언젠가 남편을 떠올리며, 남편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로 적었다. 정작 나를 거쳐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아주 감사하다고 느낀다. 덕분에 내가 한 뼘 자랄 수 있었구나. 덕분에 내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인간에 대한 카테고리를 또 하나 만들 수 있게 되었구나. 딛고 일어서는 법이랄지, 충전과 회복의 과정이랄지, 배려와 애정의 든든함이랄지, 혼자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것들을 알려준 고마운 이들. 나를 눈물짓게 하고 고민하게 만든 사람들 마저 내게 배움의 씨앗을 주었다. 진심으로 나를 스쳤던 모든 인연과, 일들과, 환경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