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출근길에 오빠와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교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과거에 우리를 가르쳤던 교수 생각이 났다. 주로 싫어하지만 어떤 부분은 또 좋아라 했던 사람이다. 노익장 여교수였는데, 학교 내에서 무섭고 까칠하기로 유명했다. 강의실에 등장하면 항상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학생들을 기죽이는 게 그분의 특기였다. 그럼에도 약간은 호감을 가지고 있던 건 '그래도 잘 가르치지 않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은 맞았다. 책도 여러 권 쓰고 학회나 관련 단체에서도 이름 좀 날리는 사람 같았으니까.
덧붙이자면 엄마는 내게 어릴 때부터 '선생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나는 그 가르침에 따라 평생의 선생님과 교수님들을 대부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래서 이렇게 험한(?) 선생님, 교수님에 대해서도 좋게 보려고 노력한 부분도 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압박감에 의한 강의력>이 과연 좋은 것이었나 의문이 든다. 편안한 분위기에서도 좌중을 압도하고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교사, 교수, 강사, 명사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만들고서 하는 강의라면, 누구나 강의의 마에스트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교수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웃음이 피식 나오는 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이었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교수는 여느 때보다는 조금 들뜬 모습으로(무서운 건 마찬가지)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방학 때 뭐 했나?"
질문을 받은 학생이 답했다. "여행 다녀왔어요"
교수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또?"
학생은 잠자코 고민하다 답했다. "그러곤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식의 질문을 여러 명의 학생에게 던졌고, 다들 방학 동안 한 일은 두세가지에 그쳤다. 교수의 '또, 또, 또' 폭격 앞에서, 무력하게 대답을 멈췄다. 그러던 중 늘 앞자리를 사수하던(민망하지만 학과 공부를 좋아했다) 내게도 질문이 들어왔다.
"방학 때 뭐 했나?"
"한국사 땄어요"
"또"
"토익 공부 했어요"
"또"
"00 공부했어요"
"또"
"책 읽었어요"
"또"
"아르바이트했어요"
"또"
"봉사활동 갔어요"
"또"
"(왜 자꾸 그러지?) 여행 다녔어요, 국내 해외..."
그렇게 몇 번의 또또또 폭격이 오갔다. 지금은 졸업한 지가 꽤 돼서 기억은 안 나지만 교수의 질문에 끝까지 답했던 것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끝없이 답하는 나를 보며 눈동자가 얼핏 흔들렸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나도 참 나인 게 그냥 멈춰줄 법도 한데, 희한하게 그때 방학만큼은 정말 알차게 보냈기에 답변을 끝낼 수가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고 알바하고 봉사하고 여행 가고 친구들이랑 놀고 책 읽느라 바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시간을 보냈다.
'또또또' 폭격의 목적은 결국 자랑이었다. 나에게 하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늬들은 맨날 그런 것 밖에 안 하지? 나는 이 나이에 이↗ 할머니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고 왔다!! 어떠냐. 늬들이랑은 차원이 다르지?! 늬들 세상에는 그런 것 밖에 없는 거다. 맨날 놀고 먹고 쉬고! 알~바 해서 뭐 한두푼 밖에 더 버나!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려면 !@#%$%^~"
뭐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 이런 사람도 언젠간 이불킥하는 날이 올까? 갑자기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에베레스트 등반 비용이 3,000~5,000만원이란다. 당장 30만원도 없어서 알바하는 학생들에게 구태여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하물며 방학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고 쉬면 어떠한가? 그 또한 값진 인생인 것을. 가치에 경중이 있나? 개인의 취향은 평가당할 수 있는 것인가? 삶의 무게는 비교 가능한 것인가? 좋은 인생, 나쁜 인생, 멋진 인생, 구린 인생 따로 있나?
그의 인생을 생각해 봤다. 아는 바로는 다른 교수와 다툼이 잦았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교단에서 보냈다. 간략히 설명되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그중에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아니 많았을 텐데. 그녀를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겸손하게 했을 것들이 많았을 텐데.. 안타까웠다. 내 입장에선 이 장면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니, 그것은 그녀의 외로운 말로였다.
한 편의 서사가 떠올랐다. 교수의 인생에도 순수했던 순간이 있었겠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던 순간이 있었겠지.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비참해 보였다. 나를 알아달라고, 존경해 달라고 애쓰는 모습(솔직히 말하면 발악으로 보였다)이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그녀는 꼭 타인이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닮고 싶지 않은 어른, 타산지석, 내가 지양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고루 갖춘. 교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손에 꼽히는, 모순이 많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