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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Jun 07. 2024

욕조에서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오빠는 이미 따듯한 물에 들어가서 책을 읽는 중이고, 나는 옆에서 양치를 하고 있었을 때다. 거울을 보며 이를 닦다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주 흔한 일이라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내가 떠올린 재미난 생각이란 갑자기 잠옷을 홀딱 벗고 욕조에 퐁당 들어가는 것이었다. 책에 물이 튀니 풍덩 들어갈 순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혼욕하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도구가 필요했다.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가슴 뛰는 소설>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양치를 빠르게 끝내고 옷을 훌렁훌렁 벗고는 핫핑크색 책을 들곤 물속으로 퐁-당 들어갔다. 오빠는 별 기색도 없이 엉덩이를 움직여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안타깝게도 '욕조에서'라는 글의 제목에 걸맞는 야릇함 따위는 없었다. 오빠는 아마 뇌과학이나 마케팅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이고 아마 이보다 건전한 혼욕은 세상에 없을 거다. 

그렇게 독서는 시작됐고, 나는 책의 네 번째 소설인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를 읽어 내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청년백수로 한 남자를 짝사랑한다. 직업도 없고 머리숱도 없는 구질구질한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이 사랑 이야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소설은 남자의 '손'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했고, 나는 손으로 설명되는 남자의 매력들에 꽤나 공감했다. 

나도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즉 오빠가 직장 신문에 기고한 <에밀 뒤르켐 자살론을 보면의 어쩌구> 글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학자의 이름을 대며 논리정연하고 깔끔한 글을 보고 있으려니 글쓴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더 정확하게는 학식과 교양이 느껴지는 문자를 나열했을, 그러니까 키보드 위에 나란히 놓였을 그 섹시한 손가락이 궁금해졌다. 

오빠를 알게 되고나서부턴, 손에서 팔로 이어지는 약간 까무잡잡한 빛의(그때 시선으론 구릿빛을 띄었던) 육감적인 태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저 손을 잡으면 어떤 기분일까, 손의 온도는 따듯할까 차가울까, 저 팔에 안기면 어떤 고양감이 들까 여러 상상에 휩싸이곤 했다.

손도 손이지만, 이 소설 속의 남자처럼 오빠에겐 매력이 정말 많았다. 진중한 목소리며(지금은 완전 우리 집 강쥐됨) 세련된 말투며(서울깍쟁이 출신) 에밀 뒤르켐 어쩌구 글에서 이미 선보였던 교양과 높은 학식이며 뛰어난 자기 관리며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이 없었다. 옆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면, 오빠 곁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책만큼 그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쌓았다. 염색한 듯 새카만 머리 색과 눈동자도, 나보다 보드라운 피부도 좋았다. 남자 답지 않게 깨끗한 것도 좋았다. 야생마처럼 살던 나완 달리 집이 어질러져 있어도 위생 개념만큼은 확실했고, 특히나 자기 몸에 닿는 건 결벽인가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이상하게 오빠는 운동 후에도 땀냄새가 거의 없었고, 한 번 입은 옷은 바로 세탁했으며, 양치를 할 때는 워터픽-치실-칫솔-가글 순으로 하는 등 빈틈이 없는 남자였다. 그냥, 모든 게 내 스타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렁뚱땅 천방지축 돌멩이인 나와 달리, 오빠는 배려와 선한 마음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득문득 보이는 따듯한 마음과 약자에 대한 공감은 그를 빛나게 했다. 요리 솜씨는 어떠한가. 레스토랑에 가야 먹을 수 있던 고급 양식 요리나 타코, 퀘사디아, 후무스, 팟타이, 살사, 로스트 치킨과 같은 이국적인 음식은 더 이상 흔치 않은 메뉴가 아니게 되었다. 좋은 호텔이나 레스토랑만 가도, 그런 곳에 익숙한 오빠는 그런 곳을 어색해하는 내게 듬직한 남자였다. 소설의 말을 빌려 '오뜨 꾸뛰르' 적인 생활양식은 그를 멋지게 보는 데에 더욱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했다. 네가 나한테 안 넘어오고 배겨? 어딘가에서 찾아보니 이게 내 mbti인 enfp의 특징이란다. 그런데 오빠는 여태껏 내가 만났던 남자들과는 달랐다. 좀 특이했다. 외향형임에도 아메리칸 스타일이어서 그런가 혼자 있는 걸 즐겼고, 심지어 처음엔 날 집에 바래다주는 것에도 인색했다. 서울 사람들은 집까지 알아서 간다나 뭐라나. 어쩌라고, 여긴 서울이 아닌데? 바래다 달라고 까지는 아니어도, 꼭 여자친구를 바래다줘야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옴므파탈 내 친구(여자지만 팜므파탈이라 하기 싫음)가, 고전하던 나를 보며 "이야,,, ㅇㅇ씨(오빠 이름) 쉽지 않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두어 달 씨름 내지 밀당을 하다가, 결국 계획대로 오빠를 완벽히 손아귀에 넣었다(?). 정복욕과 성취감. 당시의 감정을 다른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욕조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빠는 그렇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뭐, 지금도 무척 매력적이지만(방심하지 말고 노력해라 닝겐). 

온기가 느껴지는 욕조 안. 동시에 책장을 넘기며, 그때의 설렘을 떠올렸다. 그래, 너는 그런 남자였지. 저 손등을 가만 쓸어볼까, 손바닥을 포개어 볼까, 고운 손가락을 엷게 잡아볼까, 손금이라도 봐준다고 할까, 손크기라도 재어볼까. 내 시선을 서성이게 만들었던 어여쁜 손. 다 드러나 버릴까, 부러 다른 곳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내 눈길을 데려와 머물게 했던 그 얄궂은 손. 오빠 말이라면 뭐든지 껌뻑 넘어가고 약간의 손짓이면 마음을 전부 내주었던 믿음직한 손. 어린 날의 내 가슴을 설레다 못해 폭발적인 떨림을 만들어 주었던, 다정한 손. 너는 그런 손을 가졌다.





<공감 갔던 대목>

단지 모양만 그럴싸한 게 아니었다. 그의 손은 다정하고 관대했다. 그의 손은 가정교육을 잘 받아 구김이 없고 열등감도 없으며 농담을 이해했다. 여유롭다 보니 그의 손은 타인의 손을 꺼리지 않았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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