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언제나, 그래도

<광끼>의 성연과 대주, 그리고 독수리 오형제

by 초생달

1999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첫해이자, 지금은 사장된 대학 청춘드라마의 인기가 뜨거웠던 시절이다. 특히 그해 1월부터 SBS를 통해 방영된 <카이스트>는 마니아를 양산하며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KBS 2TV를 통해 방영된 <광끼>는 그런 대학 청춘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1999년 5월 4일부터 2000년 1월 13일까지 방영됐는데 이건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본래 <광끼>는 졸업 이후 사회 초년생이 된 주인공들의 모습을 시즌2 형식으로 그릴 계획이었으나 잦은 출연진 하차 및 교체, 시청률 부진이 이어지며 36부작으로 조기에 종영했다.

예술전문대를 다니는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악바리(그래서 친구들은 그녀를 ‘바리공주’라 불렀다) 성연(최강희), 성연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바른길만 걷는 극도의 모범생 동욱(이동건, 이런 녀석이 왜 전문대에 들어갔을까), 설치예술 분야에 비범한 재능을 지녔으나 바람기 넘치는 예술가 어머니(대외적으로 명성이 높은) 때문에 방황 중인 루나(배두나), 소녀 감성 충만한 만화학도 달래(김현정), 그저 놀 궁리만 하는 대주(양동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사진관을 운영하느라 학업에 소홀한 사진학과의 민(원빈, 사진관 운영 설정은 회차가 거듭할수록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진다)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 중 루나(배두나)와 동욱(이동건)은 중도 하차하고 기존 인물(성연, 달래, 대주, 민)에 유재(장성원)가 합류하며 소위 말하는 ‘독수리 오형제’가 완성된다. 독수리 오형제라는 호칭은 ‘혼자서는 못하지만, 함께 뭉치면 큰 힘을 발휘하는’ 다섯 명을 외부에서 비꼬듯 부르는 별명이었다.

애초 서로 원해서 뭉친 사이는 아니다. 학과도 성격도 관심사도 다르던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의 교양 강좌를 함께 듣고 있었다는 점. 루나와 달래, 대주, 민 등이 결석과 과제 미제출 등으로 F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교수는 그들에게 회생할 기회를 주겠다며 모범생 성연과 동욱을 더해 광고 동아리를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션을 던져준다. 아이들은 동아리 이름을 광끼(‘광고를 사랑하는 끼 있는 아이들’의 약자)라 짓는다. 갈등도, 방황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더 단단하게 ‘하나’로 묶인다.

설정만 보면 진부하더라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드라마에는 단점이 너무 많았다. 애당초 각본의 감수성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닮아 있어 오글거리기 일쑤였다. 유치하고 낯 뜨거운 대사와 설정이 매회 반복됐다. 또한 당시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취업이 어렵던 분위기나 광고업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시청률이 저조해 관심도가 떨어졌고, 당시 한참 떠오르던 신인 배우들이 하차(이동건, 배두나)하면서 작품의 설정과 전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인물은 대체자인 것처럼 중요한 분량으로 소개되다 그다음 편에서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기도(이정진) 했다. 어찌 보면 조기 종영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36부작을 끌고 온 것도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 커뮤니티를 통해 뭉친 마니아들은 팬픽과 가상 대본 집필 등을 이어가며 ‘독수리 오형제’처럼 끈적하게 뭉쳤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광끼의 아이들은 타고난 재능을 가진 녀석들이 아니었다. 경쟁 PT나 면접에서는 매번 떨어졌고 교수에게는 혼나기 일쑤였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었다. 자신들의 감정에 솔직했기에 아이들의 서로를 마음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만큼 더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다. 드라마 속 아이들처럼 마니아들도 각별한 ‘우리’로 뭉쳤다. 틈만 나면 채팅하거나 댓글로 교류했다. 난 참석한 적 없으나 공개 모임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0년 드라마가 조기에 종영되면서 발매 준비 예정이던 OST는 무산됐다. 커뮤니티의 마니아들은 모금으로 돈을 모아 그 음원들을 담은 우리만의 OST를 제작했다. 이동건 외에는 노래 경험이 없는 신인 배우들이다 보니 노래 실력은 조악했고, 그 밖에 음원 보정도 제대로 되지 않아 그야말로 허투루 만들어진 OST였다. 그럴 만했다. 발매를 포기한 덕에 음원 작업은 완료되지 않았고, 우리는 삑사리와 음 이탈이 난무하는 음원을 건네받아 음반으로 만든 셈이었으니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36부로 드라마가 종영된 직후 마니아들이 전체 모임을 계획했다. 대학로였나, 광화문이었나. 하여튼 카페를 빌려 마련된 그 모임에 나는 가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모임이 열리는 카페 문 앞까지 갔다가 집으로 되돌아왔다. 겁 많고 얼굴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웠던 당시 내게 그 카페 문을 여는 것은 학교 전체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드라마 <광끼>에는, 그리고 그 드라마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뜨겁게 넘치는 열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성공의 근처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믿음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나 보다. 아직 젊으니까, 아직 실패해도 되는 나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광끼>의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실패해도 되는 나이를 지나 이제 실패하면 주변의 눈치를 받는 나이가 됐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 되고 싶고, 모범이 되고 싶지만, 나는 아직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고개 숙인다. 나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것일까. 그럴 때마다 위로가 되는 건 고인이 된 신해철의 말이다. 태어난 자체로 이미 축복받았으니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그러니까, <광끼>의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내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광고업계에서 자리 잡지 못해 허둥거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누군가는 실패했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고, 언제든 우리는 좌절할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속 별은 언제나 빛나고 있을 거라고, 그 별이 빛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선생님,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던 거요. 별이 반짝이는 이유가 뭐예요?”(성연)

“네가 가슴으로 바라보고 아름답게 느꼈기 때문에 반짝이는 거지. 그냥 눈으로 보면 가스 덩어리에 불과한 거거든, 별이라는 게.”(교수)

-2화, <별이 반짝이는 이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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