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의 역할

by 초생달

에디터 일을 하다 보면 시간 관리가 내 마음대로 안 될 때가 많다. 클라이언트, 필자, 디자이너 등과 함께하는 일이다 보니 내 일만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내가 원고 검토를 끝내도 클라이언트와 필자의 검토를 기다려야 한다. 검토가 끝나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고 나면 대개 시안으로 완성되는데, 책 만들기는 사실 그때부터가 진짜다. 사진, 일러스트가 텍스트와 함께 얹혀 책의 꼴을 갖추면 그때부터 정밀한 재검토에 들어간다. 안 보이던 오타가 눈에 띄고, 디자인에 따라 글자들을 바꾼다. 글자를 바꾸면 디자인이 또 아쉽다. 그런 과정을 지긋지긋하게 한참이나 주고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데이터가 마무리된다. 출력실에 넘기고 나면 인쇄와 후가공, 제본 등을 거쳐 책이 나온다.

책이 나오면 반응이 제각각이다. 색이 왜 이리 어두워요?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다. 참고로 실제 인쇄물의 색감은 PDF나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어두울 수밖에 없지만 그걸 설명하는 데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린다. 책이 나와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그나마 안심한다. 과거 단행본 에디터 시절에는 판매 압박을 받았지만, 용역을 통해 공기관이나 재단의 매거진을 주로 만드는 요즘에는 그런 부담이 덜하다. 대신 클라이언트의 입맛에 맞춰줘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 출판은 잘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멋져 보여야 한다는 클라이언트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쉽게 되지는 않는다.

매거진 작업을 하면서 제일 설레는 것은 내 의도(물론 클라이언트의 검토를 거쳐 내 첫 의도와는 많이 달라지기 마련이지만)가 표현된 기획안을 바탕으로 필자를 섭외해서 원고를 받는 일이다. 평소 즐겨 읽던 칼럼이나 책의 필자와 직접 연락해 콘셉트를 설명하고 원고를 청탁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물론 즐거움과 원고의 질은 별개다.

글을 잘 쓰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중학생 무렵부터 글을 습작하고 글밥을 먹고산 지 꽤 되는 나도 글쓰기는 한없이 두렵고 무섭다. 그러니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일반 필자들은 더 그럴 거다. 그래서 필자를 섭외할 때는 되도록 필자 후보의 포트폴리오를 꼼꼼하게 점검해 청탁한다. 혹시 모를 실수를 줄이려면 꼭 필요한 과정. 하지만 그럼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간혹 생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신문 지면에 글을 쓰며 작가로 활동한 20대 청년에게 적지않은 분량의 탐방 기사를 맡겼다. 세 개의 공간을 탐방한 뒤 써내는 취재 글이다. 온라인을 통해 취재 기사도 여럿 확인한 만큼 클라이언트와 나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받은 초고는 조금 놀라웠다. 글을 잘 썼다 못 썼다가 문제가 아니라, 글의 기본을 모르는 필자였다. 탐방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야 하는지, 취재 대상 공간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글 전체의 균형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금 당황했다. 도대체 그간 많은 온라인 기사들은 어떻게 썼던 것일까. 처음에는 분량 문제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평소 써온 글보다 더 긴 분량의 글을 청탁했던 것. 하지만 다시 정밀하게 읽고 보니 분량 문제가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의 기본기가 부족했다. 주어와 접속사, 동사는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 그리고 문장 간 흐름은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등을 전혀 몰랐다. 수정 원고를 부탁해도 소용이 없었으니, 결국 클라이언트 측 실무자와 내가 직접 글을 고치는 수밖에.

결국 대부분의 문장을 해체해 다시 재조립해 쓰는 방법으로 간신히 문제를 해결했다. 적잖은 원고료를 생각하니 살짝 화가 났다. 그냥 내가 취재해서 썼으면 그게 다 내 돈이었을 텐데. 하지만 세상은 아무에게나 청탁 기회를 주지 않는다. 풍부한 포트폴리오와 있어 보이는 경험, 작가의 인생과 관련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다. 그게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필자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거 한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잘 다듬을 수 있으면 에디터는 필요가 없는 거야. 과학기술 전문가는 기술 전문가이고, 도서관 전문가는 도서관을 잘 아는 사람일 뿐이야. 그런 전문가들이 글을 잘 쓰면 좋지만, 그렇다고 아쉬워하지는 마. 그런 전문성 있는 글을 '다수의 독자가 무리없이 읽을 수 있도록 다듬어달라고' 에디터가 존재하는 거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역할을 하고, 넌 너의 역할에 충실하면 돼. 네가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그들만큼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면 의미가 있을까? 오만하게 생각하지 마.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니까. 일이 힘들다고 느낄 때면 항상 그 선배의 말을 되새긴다. 그러고 나면 마음 한편에서 꿈틀거리던 내 오만함은 금세 초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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